Séoul (서울)

지역: 한반도 · 좌표: 37.566, 126.978 · 사건 158건

사건 목록

해사료내용
139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새 왕조가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한강변에 석축 성벽을 둘러 쌓음
1400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태종이 왕에게 직접 상소하는 함, 신문고(Sin-mun-to)를 설치
1585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히데요시가 보낸 사절 야스히로가 서울에서 조선 회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자, 히데요시가 그와 그 일가를 죽이라고 명함
1586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요시토시 사절 일행이 서울에 와서, 조선이 요구한 해적 길잡이 역적 14명을 넘기고 조선 관리들이 참수함
159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일본군이 부산 상륙 18일 만에 서울(한양)에 입성
159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가토와 고니시 두 부대가 같은 날 서울에 들어감. 왕·궁정·군대는 사흘 전 도성을 떠나 저항 없음.
159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조선 왕이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 시작(6월 9일). 식량 준비 없이 출발해 일행이 굶주림.
1592년라이 산요 「일본외사」4월 浮田秀家 등이 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감(文祿의 役 개시).
1592년라이 산요 「일본외사」가토 기요마사 군이 5월 4일 한성 남대문에 닿았는데, 문을 지키던 군사의 기치가 모두 고니시 측 것이었다.
1593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서울 대부분을 방화. 집·성문·다리·관청이 소실되고, 주민을 창끝으로 몰아냄. 쓸모 있는 장정만 남김.
1593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고 같은 날 명군 선발대가 입성. 일본군은 부산·동래 등 해안으로 퇴각.
1627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후금군이 서울을 포위하고 공성 시작. 왕은 피를 피하려 조공을 보내고 화약을 맺음.
1637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인조가 명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두 왕자를 인질로 주고,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내기로 한 조약
1647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표류한 일본인 일행이 청 황제의 호송으로 한양에 도착, 왕궁에서 대접받음
1653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네덜란드 일행이 한양에 입성 — 궁중에서 재주를 보이고 궁중 호위대에 배속됨
1657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네덜란드 일행이 한양을 떠나 말을 타고 남쪽 성곽 도시(Diu-siong, 위치 불명)로 이동
1658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왕 교체 — 앞 왕 퇴위 뒤 새 왕(Yen-chong) 즉위, 네덜란드인 처지도 바뀜
1707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청 강희제 측량 사절이 조선 왕궁에서 지도 원본을 받아 감 — 유럽 지도의 조선 지명 바탕
1784년달레 「조선 교회사」승훈이 귀국해 한양에 도착. 가져온 책·십자가·그림을 이벽에게 보냄
1784년달레 「조선 교회사」이벽이 승훈이 보낸 책을 받아 조용한 집을 빌려 틀어박혀 읽고 묵상
1784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784년 4월 왕의 스승이 천주교를 겨냥한 첫 공식 문서를 냄 — 부모·친척에게 교인과 관계를 끊으라 함. 첫 희생자 토마스 김은 재판·고문 뒤 유배지에서 죽음.
1785년달레 「조선 교회사」형조판서 김화진이 김범우(토마스)를 잡아 배교를 강요. 권일신이 나서 같이 벌 받겠다고 하자 돌려보냄, 김범우는 계속 고문
1787년달레 「조선 교회사」자체 교회 조직이 한양에서 성사를 집행. 정 도마(Jean T'soi)가 한양에 집을 빌려 성사를 맡음. 신자들이 모여 고백·영성체
1789년달레 「조선 교회사」윤유일(바오로)이 상인으로 변장해 한양에서 북경 행. 주교에게 질의 편지를 가지고 감
1790년달레 「조선 교회사」윤유일이 사절을 따라 베이징을 떠나 귀국, 주교가 비단에 쓴 답서를 가지고 한양에 돌아옴
1790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790년 9월 17일 한양을 떠난 연행 사절단 편에 교인 바오로가 실려 감 — 북경 주교에게 신앙·의식 질문을 담은 편지를 가져감.
1791년달레 「조선 교회사」홍낙안이 재상 채제공(T'sai)에게 상소해 윤지충 극형을 청함. 같은 때 진산 현감에게도 체포를 재촉
1791년달레 「조선 교회사」권일신(François-Xavier Kouen Il-sin-i) 체포, 형조(tribunal des crimes)로 끌려가 고문.
1794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794년 6월 18일 신부 주문모를 한양에 데려온 교인 셋이 고문 끝에 옥중 사형, 시신은 한강에 버려짐.
1794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794년 12월 23일 중국인 신부 야고보 쭈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도착, 바로 사목 시작.
1795년달레 「조선 교회사」지우 신부가 한양에 도착해 마티아스 최(Mathias T'soi)가 마련한 북쪽 집에 머묾. 부활절 미사를 처음 드림.
1795년달레 「조선 교회사」포졸이 신부 숨은 집을 덮침. 마티아스 최가 자기가 중국인 신부라며 나섬. 신부는 다른 교우 집으로 피함. 바오로·사바스도 같은 날 잡힘.
1795년달레 「조선 교회사」바오로(Paul loun)·사바스(Sabas Tsi)·마티아스(Mathias T'soi) 옥중 처형. 같은 밤 시신을 강에 던짐.
1797년달레 「조선 교회사」홍낙민(Luc Hong Nak-min-i)이 왕에게 올릴 보고를 모호하게 씀. 왕이 나무라자 오히려 박해를 청함.
1798년달레 「조선 교회사」황사영이 한양 애오개(Ai-o-kai) 쪽에 머물며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기도서를 필사함
1800년달레 「조선 교회사」1800년 국왕 Tieng-tsong-tai-oang이 등의 종기로 죽음 — 수술 없이 예법대로 죽었다고 원문이 서술
1800년달레 「조선 교회사」정조 임금 승하 (재위 24년)
1800년달레 「조선 교회사」섭정 대비가 시파 고관 전원을 파면하고 노론 인사로 교체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섭정 이름으로 천주교 금지 교지 반포 — 다섯 집 연좌제, 「모두 죽여 씨를 남기지 말라」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교리 서적·편지가 든 상자가 발각되어 토마스 임 체포, 상자는 어거스틴 정 것으로 판정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고관 니 카환 등 네 명에게 체포령, 금부 감옥에 갇힘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앙브루아즈 권과 어거스틴 정이 체포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앙브루아즈 권이 옥중에서 죽음 (66세, 매 맞아 죽었다는 설과 옥고로 죽었다는 설)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관리가 콜롬바 강의 집을 덮쳐 여자 노비까지 잡음 — 귀족 부녀를 잡은 첫 사례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여섯 교우가 서쪽 성문(Porte de l'Ouest) 밖에서 참수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P. 주(Tsiou) 신부가 스스로 나가 금부(Keum-pou) 감옥에 자수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신부를 숨겨 준 두 부인이 사약을 받음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여섯 교우가 사형 판결을 받아 처형됨 (샤를 정은 어거스틴의 아들)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광주(Koang-tsiou) 출신 박 씨가 서울에서 참수됨 (동행 셋은 유배)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P. 주 신부가 서울 근교 노들(No-teul, 미남도) 처형장에서 참수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김 씨(le-sam-i)의 밀고로 교리 우두머리 요한 최가 한밤중 체포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요사팟 김과 친척들이 1801년 6월 1일 도성 서쪽 작은 문 밖에서 참수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골롬바 강을 포함한 9명(여성 5명 포함)이 1801년 7월 3일 도성 서쪽 문 밖에서 참수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토마스 황(황심) 참수 후 사지 절단. 피에르 김도 함께 참수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황사영은 편지 작성자로 몰려 참수 후 사지 절단. 옥천희와 현계흠은 참수됨
1801년달레 「조선 교회사」조선 국왕 명의 서한이 청 가경제에게 보내짐. 사건을 보고하고 황사영 편지를 변명함
1801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01년 순조 즉위 뒤 섭정 대왕대비가 노론 계열 신료를 세우고 전국 박해 교지를 냄 — 신분·나이·성별 무관하게 교인 체포.
1801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01년 5월 31일 Alexander Wang 참수 — 그가 비단에 쓴 북경 주교 앞 편지(유럽 6~7만 병력으로 조선 정복 요청)가 발각되어 조정이 음모로 판단.
1802년달레 「조선 교회사」사학 금지 교서(「Instruction contre la mauvaise religion」) 반포. 교리와 제사 폐지를 비판하고 금령을 굳힘
1802년달레 「조선 교회사」찰스 니 등 여덟 명이 순교했고, 찰스 니는 22세로 참수됨. 같은 날 형장에서 처형
180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02년 1월 25일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는 새 교지 — 본문은 이것이 나라 안 모든 곳에 교리를 알린 꼴이 됐다고 적음.
1827년달레 「조선 교회사」1827년 음력 4월 21일 밤 한양에서 바오로 니(Paul Ni Tsiong-hoi)가 전주에서 온 관졸에게 체포됨 — 전주로 압송되어 그림·책 소지를 심문받음
1830년달레 「조선 교회사」1830년, 대리청정하던 익종이 중병에 걸림. 그 전 귀양 중이던 Jean Tieng lak-iong을 불러 복권시켰으나 익종이 며칠 뒤 죽음. 장례 때 관이 불에 반쯤 탐.
1832년달레 「조선 교회사」1832년 음력 9월 10일 한밤중, 한양 관졸이 안드레 황의 집을 덮침. 안드레는 없었고 숙부 베드로 황과 함께 있던 사람들 포함 10명이 잡힘. 9명은 배교하고 풀려나거나 유배됨.
1832년달레 「조선 교회사」순조가 죽고 일곱~여덟 살 아들이 왕이 되어 김씨 왕대비가 섭정하는 체제가 들어섬
1833년달레 「조선 교회사」1833년 6월(음력 5월 초), 베드로 황이 한양 옥에서 죽음. 약 여덟 달 옥살이, 70세 가까이에 고문 다섯 번.
1833년달레 「조선 교회사」중국인 사제 Pacifique(유 신부)가 조선에 들어가 있었고, 신앙 때문에 교우 9~11명이 투옥됨
1836년달레 「조선 교회사」1836년 두 명의 배신자 고발로 서울에서 여자 교우 3명과 예비 신자 5명 체포. 안양(An-iang)에서도 마을 교우 체포
1836년달레 「조선 교회사」1836년 말 교회 명령을 어긴 중국인 사제 유(Yu)가 쫓겨나 산시(Chang-si)로 돌아감
1836년달레 「조선 교회사」1836년 말 교우 안내인들이 변문(Pien-men)에서 샤스탕 신부를 맞아 한양으로 데려옴
1837년달레 「조선 교회사」임베르 주교, 국경에서 13일 걸어 12월 30일 저녁 수도에 도착, 마우반과 재회
1837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37년 1월 17일 프랑스 신부 샤스탕이 상복 위장으로 Ai-chiu 세관을 지나 한양에서 모방과 합류.
1838년달레 「조선 교회사」1838년 성금요일, 수도 교외에서 함께 기도하던 과부 다섯 명 체포. 넷은 고문 뒤 풀려나 거지가 됨
1838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38년 12월 19일 주교 임베르 입국 — 왕궁 가까이에 거처를 잡음.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1839년 1월 16일 해질 무렵 포졸이 교우 세 집안(어른 열 명 남짓, 아이 일곱 포함) 체포. 기해박해의 시작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1839년 4월 7일 부활 주일 저녁 수도의 교회 주막 습격. 밀고자가 교우 쉰세 명 명단을 넘김. 수도 박해 본격화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1839년 4월 11일 여섯 여인(모녀 셋 포함)이 자진해 포졸 앞에 나섬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1839년 4월 19일 칙령 반포. 뿌리까지 뽑으라며 팔도 가택 수색, 다섯 집 연대 책임 명령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1839년 5월 9일 신자 서른다섯 명 두 번째 사형 판결. 조정이 거부하고 고문을 다시 하라고 명령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1839년 5월 24일 오후 3시 서소문 밖에서 교우 아홉 명 처형. 다미앙 남·아우구스티노 니·루치아 박 등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7월 7일 섭정 김씨 명의 교지 — 관리들의 교우 섬멸 태만을 꾸짖고 엄벌을 경고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서울 서소문 밖에서 여덟 명 참수 (음력 6월 10일)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임베르 주교가 자수해 서울 성문에 도착, 붉은 포승으로 묶여 대역죄인 취급을 받음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옥중에서 바르바라 김(8/24)·안나 한(8/29) 고문 끝에 사망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서울 서소문 밖에서 교우 여섯 명 참수 (음력 7월 26일)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교우촌 지도자 프랑수아 쵸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사망 (음력 8월 5일)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9월 21일 새남터에서 임베르 주교·마우방·샤스탄 참수 (음력 8월 14일)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폴 티엥·오귀스탱 니우 참수 (음력 8월 15일)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샤를 조 포함 아홉 명 참수 — 서소문 밖 (음력 8월 19일)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카트린 니·마들렌 쵸이·바르바라 쵸이 옥중 사망 (음력 8월 중)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마들렌 니 참수 (음력 11월 24일, 추정 12월)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필리프 쵸이·피에르 니우(13세) 옥중 교살 (음력 9월, 본문 25일/15일 불일치)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서울 교리교사 아우구스티노 박이 체포됨 (음력 9월 말)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음력 10월 18일 천주교 금압 교서가 반포됨 — 한문·한글판으로 전국에 배포, 신자 처형을 명시
1839년달레 「조선 교회사」서울 서쪽 작은 문 밖에서 피에르 최 등 일곱 명 처형 (음력 11월 24일)
1839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39년 1월 16일 박해 찬성파가 주도권을 잡고 8도 전역에 다섯 집 단위 수색 명령 — 기해박해의 시작.
1839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39년 9월 21일 프랑스 신부 셋(임베르·모방·샤스탕)을 한강변에서 참수 — 임베르는 8월 10일 자수. 시신 수습하던 교인도 붙잡힘.
1840년달레 「조선 교회사」마리 니 참수 (음력 12월 27일, 한 달 뒤)
1841년달레 「조선 교회사」서울 옥에서 앙투안 김이 곤장 60대를 맞고 다음 날 밤 교살됨 (음력 윤3월 8일 기준)
1841년달레 「조선 교회사」1841년 음력 2월, 필립 조(Philippe T'soi)의 은신처를 알 만한 교우들을 잡아 고문
1841년달레 「조선 교회사」음력 8월 10일, 앙드레 허와 프랑수아 쿠엔을 교살(옥중 6개월 여 뒤, 쿠엔 46세)
1841년달레 「조선 교회사」음력 8월 14일, 아나스타지 Tsiang 교살(48세)
1841년달레 「조선 교회사」음력 9월 23일, 필립 조(Philippe T'soi) 교살(51세)
1845년달레 「조선 교회사」1845년 김대건(André Kim)이 서울 관청의 공식 도면을 바탕으로 지도를 옮겨 그림
1845년달레 「조선 교회사」1845년 3월 27일 안드레 김이 서울에서 쓴 편지 — 서울에 집을 사고 배를 마련, 페레올 주교 도착 준비
1845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45년 1월 8일 김대건이 국경을 넘어 한양에 도착 — 동료 셋이 국경 밖 외진 곳에서 맞아 들임.
1846년달레 「조선 교회사」김대건 신부가 한양 근처 강가 처형장에서 참수됨
1846년달레 「조선 교회사」왕이 판관에게 명해 남은 신자 여덟 명을 죽이게 함 — 찰스 히엔은 참수, 나머지 일곱은 감옥에서 교살
1846년달레 「조선 교회사」찰스 히엔이 자기 집에서 체포됨 — 함께 여자 넷도 잡혀 옥에 갇힘
1846년달레 「조선 교회사」조셉 님이 매를 맞아 죽도록 명이 떨어져 하루 종일 맞은 뒤 감옥에서 교살됨
1848년달레 「조선 교회사」프랑스 배가 떠난 뒤 박해 소문이 커지자 페레올 주교가 한양 근교에서 사목을 멈추고 한동안 숨음
1848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48년 말 토마스 최가 Ai-chiu 국경을 무사히 넘어 며칠 뒤 한양 도착 — 이후 종교서 인쇄·교인 1850년 1만 1천 명 기록.
1849년달레 「조선 교회사」토마 쭤이가 변문에서 출발해 압록강 관문을 몰래 넘고 한양에 도착 — 마이스트르는 청 쪽에 남음
1849년달레 「조선 교회사」헌종이 23세로 죽고, 강화도에 유배돼 있던 18세 새 왕이 즉위.
1851년달레 「조선 교회사」1851년 9월 다블뤼 신부가 길가에서 국왕 행차를 봄. 선왕 묘소 참배, 도성에서 약 네 리(lieues) 떨어진 곳.
1852년달레 「조선 교회사」상륙 뒤 주교 쪽에서 사람을 보내 마이스트르를 데려옴. 약 15일 뒤 세 신부가 재회.
1853년달레 「조선 교회사」페레올 주교가 서울 주교관에서 사망. 교우들은 이교도에게 죽음을 숨기려고 밤중에 시신을 옮김.
1854년달레 「조선 교회사」잔수 신부가 3월 수난주간에 입국. 조선 배로 옮겨 타 며칠 뒤 서울 도착.
1857년달레 「조선 교회사」다블뤼(Daveluy)가 주교로 서품됨(아코네스 주교). 3월 25일 밤 베르뇌 주교 집에서 비밀리에 거행, 이어 사흘 동안 첫 시노드
1857년달레 「조선 교회사」페롱(Féron) 신부가 조선에 도착. 요동에서 기다리다 중국인 밀무역 배를 얻어 타고 조선 해안으로 들어와, 3월 31일 새벽 한양 베르뇌 주교 집에 닿음
1857년달레 「조선 교회사」가을, 왕대비(국왕의 양모) 사망으로 국상. 이후 전 국왕의 왕비 쪽이 권력을 노려 현 국왕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 두 주요 인물이 사사됨
1857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57년 3월 31일 페론 신부가 조선 밀수선을 타고 들어와 한양에서 주교 베르뇌와 재회 — 같은 해 교인 1만 6,500명 기록.
1859년달레 「조선 교회사」9월 말 콜레라가 한양을 덮침, 관청 보고로 전국 40만 명 이상 사망
1859년달레 「조선 교회사」12월 말 서울에서 부유한 교우 체포로 시작된 박해, 지방 교우촌도 수색·약탈
1861년달레 「조선 교회사」철종 장인 김문근의 환갑잔치 — 지방에서 상납을 강요해 충청 지방장관이 잔치 후 파면됨
1861년달레 「조선 교회사」1861년 2월 연행사 귀환으로 베이징 함락·황제 피신 소식 확인 — 서울과 각지 공포
1861년달레 「조선 교회사」프랑스 선교사 4명(랑드르·조안노·리델·칼레) 입국 — 체푸 출발, 메린토 섬에서 배 안 대기 후 밤중 한양 입성
1863년달레 「조선 교회사」알렉시 우,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 받음 (1863)
1864년달레 「조선 교회사」철종 승하 (1864.1.15, 재위 14년). 이후 궁중 권력 교체의 시작
1864년달레 「조선 교회사」조대비가 옥새를 빼앗아 열두 살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 김씨 일파 실각
1864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64년 1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음 — 조대비가 옥새를 쥐고 대원군 아들 12세를 왕으로 세움, 대원군 9년 집권 시작.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신자 측 세 명이 섭정에게 「프랑스·영국과 동맹하면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는 서한 제출. 섭정은 말없이 서한을 넓적다리 밑에 깔아 둠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다블뤼 주교 1866.1.25 서울 도착, 베르뇌 주교 1.29 도착 (섭정 면담 준비 중 서울로 모임)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섭정이 서양 주교·신자 처형 칙령에 서명, 옛 금교법 적용 결정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베르뇌 주교, 서울 자택에서 체포 (집 담을 넘어 침입, 밀고자 Ni Son-i 가 사다리 제공). 같은 날 신자 6명도 체포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브레트뉴리에르 신부가 머물던 서울 신자 집(교리교사 마르코 팅) 포위·연금 (25일), 26일 법정 연행. 신부는 「나는 영혼을 구하러 왔다, 기꺼이 죽겠다」 답변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병든 니 마티외가 정 베드로 집에서 굶어 죽음 (서울)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베르뇌 주교 처형 (3월 8일). 다블뤼가 같은 날 교구장 직을 이어받음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뿌르티에·프티니콜라 처형. 마르크 티엥·알렉시 우도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처형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김계호 토마스·바오로 김·니, 새남터에서 처형 (9월 8일 또는 10일)
1866년달레 「조선 교회사」프랑스 함대 한강 진입, 서울 앞 정박 (9월 25일 저녁)
1866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66년 청나라 사신이 왕궁 안 「남쪽을 위한 궁」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룻밤 묵었다.
1866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66년 3월 병인박해: 3월 8일 베르뇌 주교 등 4명 한강변 참수, 3월 11일 프랑스 신부 2명과 신학생 12명, 3월 30일 다블뤼 참수.
1866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프랑스 군함 두 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 앞에 정박, 여러 날 수심과 높이를 재고 측량함
1866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조정이 천주교 근절을 결정, 신자를 한강변에서 참수하고 여성과 아이까지 처형 명령
1873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고종이 성년에 이르러 대원군을 실각시킴. 본문은 왕비가 뒷받침했다고 적음
1881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척사 유생 이만손(본문 Ni Mansun)이 칠 일간 궁궐 앞에서 상소 농성, 인천 개항과 개화 정책 중단을 요구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1882년 7월 서울 소요 때 섭정 칭호(일본어 표기 Tai-in kun)가 서양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다.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일본 장교(Horimoto 중위 지휘)가 서울에서 뽑은 병사를 훈련함. 군제 개편의 시작.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미·청 조약 서명 나흘 뒤 서울에서 9살 세자의 혼례(준 대감의 딸). 행렬이 거리를 지남.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7월 23일 왕이 기우제 중 밖에 있을 때 대원군 측 폭도가 왕을 잡으려 함. 왕은 궁성으로 피함.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7월 23일 폭동으로 민비, 세자와 세자빈, 대신들과 일본인 7명이 살해됨. 하루 만에 피가 낭자.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7월 23일 저녁 5시 50분 폭도가 일본 공사관을 덮침. 총·화살·돌을 쏘고 불을 질러, 일본인들이 남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칼과 권총으로 포위를 뚫음.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하나부사가 일본 군 호위를 받고 8월 16일 서울에 다시 들어감. 조선 측은 예의로 맞음.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8월 20일 하나부사가 왕을 알현, 일본 정부의 요구를 전달.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요구에 대한 확답이 없자 하나부사가 8월 25일 서울을 떠나 배로 돌아감. 무력 위협.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대원군의 사과를 받고 하나부사가 8월 30일 서울로 돌아옴. 일본 요구를 전부 수락.
1882년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뉴욕 트리뷴 10월 2일 전보(9월 13일까지 소식): 조선 정부가 반란자 20일 내 체포·처벌, 손해배상·사과사절 등 일본 요구 조건 서약.

그곳이 든 같은 일

지도에서 보기 — 달레 「조선 교회사」 사료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