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서아시아 · 좌표: 41.008, 28.980 · 사건 410건
| 해 | 사료 | 내용 |
|---|---|---|
| 324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콘스탄티누스가 다시 전쟁 — 뷔잔티움과 크뤼소폴리스를 점령, 리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도망 |
| 324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온 성벽을 15스타디온 넓히고 궁전·경마장·광장·신전을 세우고 로마에서 따라온 원로원 의원들에게 집을 지어 주었다 |
| 33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콘스탄티누스가 뷔잔티움 자리에 도시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 함 |
| 337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콘스탄티누스의 시신이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로 옮겨졌고 로마 민중은 매우 슬퍼했다 |
| 36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율리아누스가 시신을 맞아 나란히 천도를 따라가 궁에 들어감(군·원로원 영접). |
| 404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에우독시아가 크리소스토모스를 미워해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스와 결탁, 아르카디우스에게 그를 유배시키도록 설득. |
| 408년 | 프로코피우스 | 아르카디우스가 비잔티온에서 죽음을 앞두고 어린 아들 테오도시우스와 제국의 앞일을 어찌할지 고심 |
| 45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마르키아누스 사망 — 일부는 아스파르 사주 독살이라 함 |
| 45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레오 즉위 직후 아스파르가 아들 하나를 카이사르로 세우라고 재촉 |
| 47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아스파르와 아르다부리오스가 황제에 의해 제거됨 (일부 전승) |
| 474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레오 1세 병사, 재위 18년 후 어린 손자 레오 2세가 뒤를 잇다 |
| 475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바실리스코스가 캄푸스에서 왕으로 추대됨 (제노 축출 시도) |
| 49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제노 사망, 아리아드네가 아나스타시오스를 황제로 올림 (원로원·군대 동의) |
| 51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트라키아인 비탈리아노스가 참주를 꾀하며 도시 쪽 농토를 황폐화, 함대로 도시를 공격 |
| 518년 | 프로코피우스 | 아나스타시우스가 죽고 유스티누스가 제위를 이었으며, 카바데스는 자기 사후 왕위 문제로 근심 |
| 518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아나스타시오스가 죽기 직전 음모 고발, 유스티누스·유스티니아누스 등을 체포 |
| 518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아나스타시오스 사후 후계 결정 — 아만티오스가 돈을 유스티누스에게 주어 군사에게 나눠 주게 함 |
| 531년 | 프로코피우스 | 헤르모게네스의 강화 사절이 실패하고, 벨리사리우스는 지휘권을 박탈당한 채 비잔티온으로 소환 |
| 532년 | 프로코피우스 | 비잔티온에서 청색당·녹색당이 갑자기 대폭동(니카 반란) |
| 532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와 문도스가 병력을 이끌고 경기장 쪽으로 몰려든 군중을 공격해 진압 — 폭동이 끝남 |
| 532년 | 프로코피우스 | 황제가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동방 총사령관에 앉히고 리비아(반달) 원정을 보냄 — 페르시아는 평화를 후회 |
| 532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유스티니아누스가 큰 화재 뒤 더 크고 화려한 성당(소피아) 재건을 시작함 |
| 533년 | 프로코피우스 | 유스티니아누스가 반달 원정을 공표하나 다수가 레온 원정 실패를 떠올려 반대 |
| 533년 | 프로코피우스 | 7번째 해 하지 무렵, 총독 함선이 궁 앞 해안에 정박 — 총대주교 에피파니오스가 기도하고 출항 |
| 534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가 겔리메르와 반달을 데리고 비잔티온에 도착 — 600년간 장군에게 없던 개선 영예 |
| 540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가 비티기스와 고트 귀족·재물을 데리고 비잔티온에 도착 — 황제가 기쁘게 맞이 |
| 542년 | 프로코피우스 | 역병이 비잔티온에서 4개월, 절정 3개월 — 하루 5천에서 1만 이상 사망 |
| 548년 | 프로코피우스 | 황제가 파쿠리오스·세르기오스를 먼저 이탈리아에 보내고 새 원정군 준비 |
| 548년 | 프로코피우스 | 아르타바네스를 중심으로 유스티니아누스 암살 음모 모의 |
| 549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가 5년 만에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온으로 귀환 — 육지에는 상륙 못 하고 해안 요새만 오감 |
| 551년 | 프로코피우스 | 호스로에스의 사절 이스디구스나스가 비잔티온에서 장기 협상 끝에 5년 휴전에 합의 |
| 552년 | 프로코피우스 | 인도에서 온 수도사들이 황제에게 비단을 직접 만들겠다고 약속 — 페르시아 의존을 끊으려 함 |
| 600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의 아들들과 게르마누스 및 그 딸을 프로테 섬에서 처형하게 함 |
| 600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포카스가 프라시니 당파에 분노해 공적 직무를 맡지 못하도록 단죄 |
| 600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포카스가 마크로비우스 스크리보니우스를 광장에서 화살로 쏘아 죽이고 헤브도몬 성에 매달 |
| 602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포카스가 반란으로 황제가 되고 마우리키우스와 그 아들들을 죽임 |
| 61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헤라클리우스가 대함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닿고, 소피아 항 해전에서 포카스를 이김 |
| 61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헤라클리우스가 포카스의 사지와 머리를 자르고, 남은 몸은 보우스 광장에서 불태움 |
| 61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헤라클리우스가 궁전 스테파노스 기도실에서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에게 관을 받아 즉위 |
| 610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헤라클리우스가 긴 성벽까지 나가 차간을 맞아 평화를 굳히려 했으나, 차간은 맹약을 깨고 기습 |
| 61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헤라클리우스가 포카스를 사로잡아 옷을 벗겨 자기 앞에 끌어냄 — 포카스 몰락 |
| 613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헤라클리우스가 부활절 뒤 페르시아 원정에 나섬. 출정 전 교회의 기물을 녹여 돈을 마련 |
| 626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아바르인이 트라키아에서 몰려와 배와 기계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열흘간 공격, 실패하고 물러남(같은 시기 페르시아 사르바로스는 칼케돈 포위) |
| 629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헤라클리우스가 예루살렘 회복 뒤 도읍으로 돌아와 원로원과 시민의 환호를 받았다 |
| 674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아랍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해안에 나타나 7년간 해전과 포위를 이어감 |
| 674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사라센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해 봄부터 가을까지 해전이 이어졌다; 포위를 풀고 키지코스를 차지해 겨울을 났고, 이듬해 봄 다시 도시를 쳤다 |
| 695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레온티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잡아 코를 자르고 케르소네소스로 유배 |
| 698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도시에 속임수로 들어온 지휘관(원문 Prefeis, 이름 판독 불가)이 시민 재산을 약탈하고, 레온티오스를 잡아 코를 자른 뒤 수도원에 가둠 |
| 698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아프시마로스(티베리오스)가 시카이로 배를 타고 들어와 배신으로 도성을 차지, 레온티오스의 코를 베어 수도원에 가둠 |
| 705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밤에 소수와 함께 수로로 몰래 들어가 도시를 차지하고 블라케르나이 궁을 점령 |
| 705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테르벨리스의 불가리아·슬라브 군과 함께 돌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음 |
| 711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필리피코스가 싸움 없이 도시에 들어와 곧바로 무장병을 이끌고 유스티니아누스를 치러 감 |
| 712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필리피코스가 제6차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을 아나테마(파문)로 단죄 |
| 713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필리피코스의 서기 아르테미오스가 황제로 선포되어 아나스타시오스라는 이름을 받는다 |
| 717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파트리키오스 레오가 동방 군대의 환영을 받아 성대한 의식으로 입성, 대성당에서 황관을 받음 |
| 717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사라센 군이 수많은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황제의 도시 원정에 나섬 |
| 717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식수 저장고가 말라 죽은 사람의 시체로 채워짐 — 포위 속 기아·식수 고갈 (주어는 OCR로 판독 불가) |
| 717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레오 3세(이사우리아) 즉위 — 717년 3월 25일 |
| 740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10월 26일(수요일) 오전 8시경 큰 지진 — 테오파네스 인용 |
| 741년 | 니케포로스 간추린 역사 | 콘스탄티누스 5세(코프로니모스) 제위 계승 — 741년 6월 18일 |
| 780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레오 4세 사망 (9월 8일) |
| 780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에이레네가 아들 콘스탄티노스(6세)와 함께 제위를 잡음 (9월, 인딕티오 4) |
| 78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이레네 여제가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아내감으로 카롤루스 왕의 딸을 구하려고 사신을 보냄 |
| 788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콘스탄티노스 6세가 아르메니아 출신 마리아와 혼인 (11월, 인딕티오 12). 원문은 어머니가 프랑크 왕녀 혼약을 깨게 했다고 씀 |
| 789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큰 지진 — 사람들이 집 안에서 자지 못하고 천막·정원에서 지냄 |
| 79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니케포로스 카이사르(콘스탄티누스의 삼촌)를 황위에 올리려는 음모가 드러나 그의 눈이 뽑힘 |
| 795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콘스탄티노스 6세가 테오도테와 혼인 (9월, 인딕티오 4, 성 마만스 궁) — 원문은 이를 불법 혼인이라 함 |
| 797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콘스탄티노스 6세가 포르피라 방에 갇혀 눈이 뽑힘 (8월 15일, 에이레네 측 명령) |
| 79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5년 뒤 이레네가 다시 황위를 되찾음 |
| 802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황위를 노린 음모. 아이티오스 측이 레오를 황위에 올리려 함(주어 판독 불확실) |
| 802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날이 밝자 이레네를 궁에서 동쪽 궁전으로 옮김 — 이레네 폐위 |
| 806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니케포로스가 부활절 공동 투표로 총대주교가 되나, 플라톤·테오도로스가 반대함 (황제 니케포로스 1세와 다른 인물) |
| 811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스타우라키오스가 중상을 입고 물러나자 미카엘(레단 쿠로팔라테스)이 원로원·군에 의해 황제로 선포됨 |
| 811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미카엘 1세가 원로원·군 단위에서 히포드롬 황제로 추대됨 (10월 2일 제1시) |
| 811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미카엘 1세가 아들 테오필락토스를 대성당에서 황제로 대관 (12월 25일) |
| 81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미카엘 쿠로팔라테스가 새벽에 황제로 선포됨. 스타우라키오스는 머리를 깎고 수도사 옷을 입음 |
| 813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레오가 황금문으로 들어와 궁정을 점령하고 미카엘은 제위를 놓음 |
| 813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동방 장관 레오가 군에 옹립돼 도성 앞 연단에서 로마 황제로 추대되고, 정오 무렵 금문(크뤼세 문)으로 입성해 궁으로 들어감 |
| 813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미카엘이 레오 옹립 소식을 듣고 아내(원문 'Proco- cia' 줄 끊김)와 자식들과 함께 시장 곁 기도실로 피해 들어가 머리를 깎고 수도복을 입음 |
| 813년 | 테오파네스 「연대기」 | 7월 11일 대성당 강단에서 총대주교 니케포로스가 레오에게 황관을 씌움 (대관) |
| 81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아르메니아 출신 레오 5세가 황제가 됨 (소제목) |
| 815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레오 5세가 성상 파괴를 공식 결정하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동의를 강요 |
| 815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니케포로스 유배 뒤 테오도투스 멜리세노스가 대주교 자리에 앉음 (부활절 주일) |
| 815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레오 5세가 성상에 대한 박해를 시작 (소제목) |
| 815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니케포로스 추방, 테오도토스(카시테라스)가 계승 (소제목) |
| 819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레오 5세가 미카엘 2세 음모 고발을 접수하고 직접 심문. 미카엘이 사형 판결을 받음 |
| 82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레오 5세가 성당 안에서 크리스마스 새벽 기도 중 살해됨 |
| 82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미카엘 2세가 대성당에서 총대주교의 손으로 대관하고 황제로 추대됨 |
| 82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성상 공격 속에 미카엘(발부스)이 단죄됨 (소제목) |
| 82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미카엘이 레오 5세를 죽이기로 함 (소제목) |
| 82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레오 5세가 살해된 뒤 미카엘이 계승 (소제목) |
| 821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토마스의 육군과 해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께 포위. 쇠사슬 항구가 뚫림 |
| 82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토마스가 며칠 뒤 다시 도시를 육지와 바다에서 기계·사다리로 공격 |
| 822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미카엘 2세가 성문을 열고 기습해 토마스 군을 크게 무찌름. 토마스 함대도 흩어짐 |
| 829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미카엘 2세가 이질로 사망하고, 시신은 성 사도 성당(성 유스티니아누스 제실)에 안치됨 |
| 829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미카엘 2세의 아들 테오필로스가 10월에 황제로 즉위 |
| 829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즉위한 테오필로스가 아버지 레오 5세 쪽 관리들을 마그나우라로 불러 모은 뒤 체포해 처형 |
| 829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미카엘 2세가 재위 8년 9개월 만에 죽고 테오필로스가 즉위 (본문 2507, 소제목 2525) |
| 829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테오필로스가 경건한 이들에게 몹시 가혹함 (본문 3108~3109) |
| 842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테오필로스가 병으로 죽음. 죽기 전 원로원을 마그나우라에 모아 아내와 아들 미카엘을 맡김. 재위 12년 3개월 |
| 842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섭정 테오도라가 성상 숭배를 되살림. 총대주교 요안네스를 쫓아내고 메토디오스를 총대주교로 세움. 이어 성상을 교회에 복원 |
| 842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바르다스가 미카엘 3세와 짜고 총리 테오크티스토스를 궁정에서 제거. 도망치던 테오크티스토스는 칼에 맞아 죽음 |
| 856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북쪽 바다에서 온 루스(Rossi) 해군이 흑해 연안을 휩쓸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 이후 물러가 세례를 청함 |
| 867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미카엘 3세가 궁정에서 밤 셋째 시각에 살해됨. 바실리오스가 권좌를 잇고, 미카엘이 시킨 암살 음모를 피해 살아남음 |
| 86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바실레이오스 편 음모자들이 술 취한 미카엘 3세를 덮침 |
| 86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바실레이오스가 나라를 굳히고 모든 이에게 황제로 환호받음 |
| 86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바실레이오스가 대성당에 들어가려다 포티오스 총대주교에게 막히자, 회의를 열어 포티오스를 교회에서 쫓아냄 |
| 86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즉위 초 귀족 몇이 바실레이오스에 맞서다 붙잡혀 벌을 받음 |
| 895년 | 타바리 연대기 | 슬라브인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
| 913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시메온이 블라케르나에서 황금문까지 진을 쳐 도시를 노렸으나 성벽 방비를 보고 물러나 평화를 청함 |
| 91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알렉산드로스가 1년 1개월 재위 뒤 죽고, 일곱 살 콘스탄티누스가 단독 황제가 됨 |
| 91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두카스가 알렉산드로스 죽음을 듣고 황위를 빼앗음 (도성 밖에 있었다) |
| 91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도성 안 시가 전투: 섭정 쪽이 병력을 모아 맞서 싸움, 두카스 쪽 그레고라스 전사 |
| 91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콘스탄티누스 두카스가 목이 잘려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쳐짐 — 레오가 예언한 대로 두카스는 황제가 되지 못함 |
| 919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로마누스 레카페노스가 맹세를 어기고 궁에 들어가, 신의를 받고 대 헤타이리아르크로 임명됨 |
| 919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로마누스의 딸 헬레나가 콘스탄티누스와 혼인 (부활절 셋째 날, 총대주교 니콜라오스가 축도) |
| 92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불가리아군이 아무도 막지 않는 가운데 페게 궁과 스테눔을 불태움 |
| 92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로마누스가 코스미디온 바닷가에 회담 자리를 마련, 시메온과 배 위 회담 준비 (시메온은 그 전 템플 불태움) |
| 920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시메온 사후 불가리아 페트로스와 평화 맺음, 로마누스 딸 마리아와 혼인 |
| 92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로마누스가 9월 24일 카이사르(부황제) 칭호를 받음 (12월 대목은 조각 끝에서 잘림) |
| 92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로마누스가 장남 크리스토포로스 외에 아들 둘과 손자에게도 황관을 씌움; 막내 테오필락토스는 성직자로 만듦 |
| 924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불가리아 왕 시메온이 도성 공격; 로마누스는 교외를 지키려 병력을 내보냄. 불가리아군 역습에 귀족 여럿 전사, 병사 일부는 배에서 빠져 익사 |
| 928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니콜라오스 총대주교가 죽은 뒤, 아마세이아 주교 스테파노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지명됨 |
| 944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8월 15일 에데사 성상이 블라케르나이 성모 성당에 도착, 이튿날 총대주교 테오필락토스 등이 행렬로 대성당을 거쳐 파로스 성당에 안치 |
| 944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스테파노스 레카페노스(아들)가 아버지 로마누스 1세를 폐위해 프로트 섬으로 유배 |
| 944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로마누스가 콘스탄티누스와 맺은 약조를 어긴 것을 되짚음. 폐위 장면은 문장이 잘려 다음 조각으로 넘어감 |
| 948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로마누스 1세가 죽어 뮈렐라이온에 묻힘 |
| 959년 | 레온 부제 「역사」 | 로마누스가 콘스탄티노스 사후 제위를 이어받음 |
| 959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콘스탄티누스 7세가 독살 기운을 받고 도성으로 돌아온 뒤 죽음 |
| 963년 | 레온 부제 「역사」 | 니케포로스가 카이사레이아에서 수도로 진군함 |
| 963년 | 레온 부제 「역사」 | 요셉이 수도를 차지하려다 내부 소요로 실패해 달아남 |
| 963년 | 레온 부제 「역사」 | 니케포로스가 수도에 들어가 관을 받음 |
| 963년 | 레온 부제 「역사」 | 니케포로스가 테오파노와 혼인함 |
| 963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로마누스 2세 황제가 죽음(3월 15일) |
| 963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니케포로스 포카스가 대성당에서 황관을 받음 |
| 96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로마노스 사후 왕비 테오파노의 부름을 받아 포카스가 수도로 돌아옴 |
| 968년 | 레온 부제 「역사」 | 12월 22일 제4시 맑은 하늘에 해가 가려져 땅이 어두워짐; 레온은 그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고 씀. |
| 969년 | 레온 부제 「역사」 | 황후 테오파노가 요하네스 치미스케스를 몰래 궁으로 들여 니케포로스를 폐위하려는 공모가 짜임. |
| 969년 | 레온 부제 「역사」 | 12월 11일 밤 공모자들이 궁 안 침실에서 니케포로스를 죽임; 그 자리에서 요하네스가 황제로 추대됨. |
| 969년 | 레온 부제 「역사」 | 요하네스가 총대주교 폴리에욕토스의 조건을 받아들여 황후 테오파노를 프로티 섬으로 보내고, 레온 발란테스를 암살범으로 넘긴 뒤 성 소피아에서 대관. |
| 969년 | 레온 부제 「역사」 | 황후가 도메스티쿠스와 공모해 자객을 침소 옆 경당 통로로 들였고, 잠든 니케포로스 황제가 살해당함 |
| 969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치미스케스 일당이 궁에서 니케포로스 포카스를 살해 |
| 969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치미스케스가 성탄절 대성당에서 황관을 받음 |
| 969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니케포로스 2세가 자던 중 칼에 찔림. 짐미스케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죽어가는 황제에게 다가감 |
| 97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폴리에욱토스 총대주교가 짐미스케스 즉위 35일 뒤 죽고, 바실리오스 수도사(세아만드레노스)가 뒤를 이음 |
| 971년 | 레온 부제 「역사」 | 요하네스 치미스케스가 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니투스의 딸 테오도라와 혼인; 즉위 2년째 11월. |
| 972년 | 레온 부제 「역사」 | 레온 쿠로팔라테스(니케포로스의 동생)가 레스보스 유배지에서 빠져나와 몰래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에 상륙해 궁 열쇠를 위조해 입성을 꾀함;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두 눈이 뽑힘. |
| 972년 | 레온 부제 「역사」 |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선; 도로스톨룸을 '테오도로폴리스'로 개명하고 불가리아 왕 보리스에게 마기스테르 직함을 줌. |
| 975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바실리오스와 콘스탄티노스(로마누스의 아들들)가 황제로 함께 올라 실권은 바실리오스 총관(praeses)에게 |
| 976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찌미스케스 요안네스가 독살로 죽음 |
| 976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찌미스케스가 제위를 두 아들 바실리우스·콘스탄티누스에게 넘김 |
| 986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지진으로 집과 교회가 무너지고 큰 성당 둥근 지붕(구체) 일부가 파손. 황제가 금 10 센테나리움을 들여 재건 |
| 1025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음 (본문 표기 LXXIT, OCR 그대로 — 수치 미검증) |
| 1034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로마누스가 죽고 미하일이 즉위함 — 총대주교 알렉시오스가 궁으로 불려 감 |
| 1040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요한이 병든 황제를 설득해 조카 미하일을 카이사르로 세움 — 조에의 승계를 막으려는 것 |
| 1042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시민 폭동으로 조에·테오도라가 복위. 미하엘 5세는 눈이 뽑혀 수도원에 유배됨 |
| 1042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민중이 조에를 극장에 세우고, 이어 테오도라 쪽으로 돌아서 대성당 쪽으로 몰려감 |
| 1042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조에의 선택이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코스에게 기움 — 그는 로마누스 황제의 조카딸을 첫 아내로 맞았다 여읜 귀족 |
| 1043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루스(러시아) 군주 블라디메르가 대규모 함대로 수도를 공격. 바실리오스 테오도로카노스가 야간에 기습해 불배 화공으로 배 7척을 태우고 3척을 가라앉힘. 루스 함대는 바위에 부딪쳐 대다수 파손 |
| 1043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총대주교 알렉시오스가 죽고 미하일 케룰라리오스가 자리를 이음 |
| 1044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3월 9일 황제 공개 행렬이 시민 소요로 중단 — 시민이 모노마코스의 첩 스클레라이나의 황후 자리를 반대하고 죽이라고 외침, 황제는 궁으로 돌아감 |
| 1047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토르니키오스 반란군이 9월 수도 포위 — 블라케르나이 쪽 진영, 황제 측이 저녁 출격해 방벽을 뚫고 격퇴, 토르니키오스 물러남 |
| 104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레오 토르니키오스가 갑자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해 성벽 앞까지 감 — 병사와 시민이 많이 따름 |
| 1054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모노마코스 사망 — 마강 수도원 근처에 장례, 황후 테오도라 단독 통치 시작 |
| 1056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테오도라 황후 사망 — 8월 말, 장 질환으로 |
| 1056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내시와 레오 신클렐로스가 노령의 미카엘 스트라티오티코스를 황제로 추대 — 실권은 측근이 쥠 |
| 1056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테오도시오스 반란 — 대성당으로 향했으나 총대주교와 성직자가 문을 닫아 막힘, 병력이 흩어져 체포되어 페르가몬으로 유배 |
| 1057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미카엘 6세 스트라티오티코스가 제위를 내려놓고 자기 집으로 떠남 — 다음 날 암부스토스가 궁에 들어가고 이사키오스도 그날 저녁 입성 |
| 1057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이사키오스 콤네노스가 9월 1일 대성당에서 공식 행렬 뒤 황제로 대관 |
| 1057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미카엘 6세가 총대주교 말을 듣고 황제 표장을 벗고 물러남 — 콤네노스가 궁 점령 명령 |
| 1059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이사키오스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에게 황위를 넘기고 스투디오스 수도원으로 들어감 |
| 1068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에우도키아가 로마누스 디오게네스와 혼인, 디오게네스가 황제로 선포됨 |
| 1071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요안네스 카이사르 쪽이 황후 에우도키아를 수도원으로 보내고 미하일을 황제로 선포하며 로마누스의 귀환을 거부하다 |
| 1078년 | 스킬리체스·케드레노스 「역사 개요」 | 미하일 7세가 궁에서 쫓겨 수도원에 보내지고, 보타니아테스가 입성하다 |
| 1081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코무니노스 일가가 새벽 전 문을 열고 가족을 데리고 콘스탄티노스 광장으로 나감 — 쿠데타 개시 |
| 1081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반란군이 블라케르나 성문 자물쇠를 부수고 황실 마구간으로 들어감 |
| 1081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성금요일(4번째 인딕티오, 6589년 4월)에 코무니노스 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진입 |
| 1081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팔라이올로고스가 함대로 도착해 환호를 시작하자 성벽 위 코무니노스 측이 조용히 하라고 함 |
| 1081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알렉시오스가 총대주교 코스마스의 오른손으로 황후 없이 대관됨 |
| 1081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알렉시오스가 4번째 인딕티오 8월에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이삭에게 도성 행정을 맡김 |
| 1081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보타네이아테스가 궁을 떠나 페리블렙토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복을 입음, 코므노이가 무저항으로 입성 |
| 1082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황제가 블라케르나 궁에서 교회 대회를 소집해 피고로서 교회 재산 정발을 변명함 |
| 1096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황제가 백작들과 고드프루아를 불러 신하의 서약을 하게 하려 함 |
| 1096년 | 티레의 윌리엄 | 베드로가 흩어진 군세의 잔병을 모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
| 1096년 | 티레의 윌리엄 | 고드프루아가 황제에 사절을 보내 억류된 위그를 풀게 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
| 1097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라틴군과 황제 측 사이에 양쪽에 사상자가 난 교전이 벌어짐 |
| 1097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백작들이 도성에 닿아 코스미디온 수도원 근처에서 히에론까지 군을 배치함 |
| 1097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보에몬드가 해명하자 황제가 디라키온에서의 옛 적대를 농담으로 상기시킴 |
| 1097년 | 티레의 윌리엄 | 콘스탄티노폴리스 성 앞에서 큰 전투 — 그리스군 대량 희생 |
| 1097년 | 티레의 윌리엄 | 노르망디 공 로베르와 외스타슈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의 큰 선물과 영접을 받음 |
| 1100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보고밀 교주 바실리오스의 제자들을 위해 궁 폴로장 치키스테리온에 화형대를 쌓음 |
| 1101년 | 티레의 윌리엄 | 황제가 튀르크를 부추겨 순례자를 매복 공격, 남은 자만 예루살렘에 이름 |
| 1102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안나(어머니) 사망 뒤 세바스토크라토르 이사키오스가 1년 안에 수도복 입고 사망 |
| 1118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황제가 숨을 거두기 직전 황후가 머리맡에 몸을 던짐 — 알렉시오스 서거 |
| 1118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황제 알렉시오스가 병이 깊어 마지막에 궁에서 숨짐(AM 6626). 황제의 아들과 현 황제에게 아버지가 숨을 거두고 있다고 전해짐 |
| 1118년 | 조나라스 역사 요약 | 황궁에 들어간 뒤 어머니·형제·자매를 어떻게 다룰지 카이사르 브리엔니오스가 측근과 숙의 — 새 일을 꾸밀까 두려워함 |
| 1148년 | 티레의 윌리엄 | 콘라트 황제가 귀국하고 프랑스 왕은 시리아에 머무름 |
| 1157년 | 티레의 윌리엄 |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가 도착;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왕의 혼인 사절을 보냄 |
| 1161년 | 티레의 윌리엄 | 왕이 트리폴리 백작 누이 밀리센트를 천거하나 황제가 1년 뒤 물리고 레몽의 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음 |
| 1171년 | 티레의 윌리엄 | 왕이 일부 제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감, 황제가 맞음 |
| 1171년 | 티레의 윌리엄 | 황제 앞에 인도되어 정중히 대접받고 필요한 일을 협의 |
| 1180년 | 티레의 윌리엄 | 왕이 여동생을 세 번째 남편 온프루아에게 줌;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가 사망 |
| 1182년 | 티레의 윌리엄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요가 일어나 안드로니코스가 득세하며 라틴인에 대한 박해 |
| 1203년 |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 「역사」 | 제4차 원정 군대가 이사키오스의 아들 알렉시오스를 데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십자군 함대가 해협을 거슬러 올라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 생 스테파노 수도원 앞에 닻을 내림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콘스탄티노폴리스 항구의 갈라타 탑을 공격해 점령 — 항구 사슬을 끊고 함대를 항구 안으로 들임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1203년 7월 17일 목요일 아침, 열흘 가까이 끈 준비 끝에 십자군이 성벽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함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도제가 눈먼 채 성 마르코 깃발을 들고 상륙을 밀어붙임 — 베네치아군이 성벽 탑 25개를 점령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알렉시오스 3세가 금은을 챙겨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도망하고, 시력을 잃은 이사키오스 2세를 다시 황제로 세움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젊은 알렉시오스가 8월 1일 성 베드로 축일에 그리스 황제식으로 대관됨 — 밀린 돈을 나눠 줌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그리스인과 라틴인 주민이 충돌하고 불이 나 도시가 이틀 밤낮 탐 — 라틴인 약 1만5천 명이 해협 건너 십자군 진영으로 옮김 |
| 1203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그리스인이 불붙인 배 일곱 척을 해협 바람에 실어 십자군 함대로 보냄 — 베네치아 배들이 밤새 불배를 끌어내 바다로 흘려보냄 |
| 1204년 |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 「역사」 | 십자군이 40일 포위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약탈 (4월) |
| 1204년 |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 「역사」 |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가 알렉시오스 4세를 죽이고 그 딸 에우도키아와 혼인 |
| 1204년 | 노브고로드 제1연대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서사 도입부: 알렉시오스가 형 이삭을 눈멀게 하고 제위에 오르고 그 아들 알렉시오스를 가둠 |
| 1204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그리스 귀족 무르추플로스가 밤에 알렉시오스 4세를 침상에서 끌어내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 황제가 됨 — 이사키오스 2세도 곧 죽고, 알렉시오스 4세는 목졸려 죽음 |
| 1204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4월 8일 목요일 배에 올라 이튿날 금요일 아침부터 성벽 백여 곳에 공격 — 십자군이 밀려 배로 되돌아감 |
| 1204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4월 12일 월요일 십자군이 성벽 탑들을 넘어 도시를 점령 — 무르추플로스는 황금문으로 달아남 |
| 1204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13일 아침 부코레온 궁이 보니파키우스에게, 블라케르나이 궁이 헨리에게 항복 — 궁 안 금은과 궁중 귀부인들이 잡힘 |
| 1204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약탈품을 세 교회에 모아 나눔 — 베네치아에 5만 마르크, 병력이 10만 마르크 이상을 나눠 가짐(보병 둘을 기마 한 명으로 셈) |
| 1204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볼드윈 대관식, 성 소피아 성당 — 1204년 5월 16일 |
| 1204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무르주플레스(눈 뽑힌 뒤 살해자) — 콘스탄티노폴리스 기둥 위에서 떨어뜨려 처형 |
| 1206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헨리 황제 대관식, 성 소피아 성당 — 1206년 8월 20일 |
| 1207년 | 빌라르두앵 「콘스탄티노플 정복」 | 헨리 황제가 보니파시오의 딸 아그네스와 성 소피아에서 혼인 — 1207년 2월 4일 무렵 |
| 1231년 |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 「역사」 | 예루살렘 왕 요하네스 드 브리엔이 바다로 들어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
| 1244년 | 매슈 패리스 대연대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 발두인이 그리스인의 박해를 피해 달아나 황제 프리드리히에게 도움을 청함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점령하려 꾀함 — 성공하면 거기서 로마 황제로 선포되게 한다는 계획 (주체는 이 줄 문맥에서 못 확인)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라틴인이 지키던 도시를 공격하자는 제안에 병사들이 흔들리지 않음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미카엘의 아들 요안니스가 볼모로 넘겨짐 — 그 어머니가 협정을 맺으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감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황제가 제노바인 교역(염료·양모 관련 거래)을 칙령으로 금지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제노바 배들이 황제 몰래 콘스탄티노폴리스 앞을 지나가자 황제가 분노해 제노바인을 굴복시킬 방도를 찾음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제노바 선원이 시비 끝에 사람을 죽이자 황제가 제노바인에게 그 사람(노 젓는 자)을 넘기라고 함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황제가 무스잘론에게 제노바인 전원을 지체 없이 몰살하라고 명령, 군이 집집마다 수색 준비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황제가 블라케르나이 궁 높은 자리에 서서 포로들이 한 명씩 줄지어 끌려가는 개선 행렬을 봄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라조이(Lazi) 사절들이 요안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황제의 딸과 혼인하기로 맹세함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라조이 군주 이오안니스 사망 — 아내 에우도키아가 아들을 데리고 수도로 감 |
| 125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안드로니코스가 베네치아 함대의 수도 도발을 막지 않고 반격을 미룸 |
| 1261년 |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 「역사」 | 스트라테고풀로스 부대가 밤에 성벽의 틈으로 15명 이상을 들여보냄 |
| 1261년 |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 「역사」 | 스트라테고풀로스와 로마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 라틴인들은 도주하고 도시가 로마 측으로 돌아옴 (7월 25일) |
| 1261년 |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 「역사」 | 미카엘 황제가 8월 14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블라케르나이 근처 코스미디온 수도원에 진영 |
| 1261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로마인이 도시(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음 |
| 1261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온 이탈리아인 대사단에게 황제가 휴전을 허락 |
| 1261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도시가 황제 권력으로 돌아온 뒤, 상대 측이 아내와 아들을 보내 평화를 논의하게 함 |
| 1261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미카엘이 힘으로 되찾은 도시의 전리품을 황제 몫으로 돌리고 평민 몫은 미룸 |
| 1261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미카엘이 제노바·베네치아·피사 사람을 회유해 붙잡으려 하고, 안 따르면 무장 해제하려 함 |
| 1261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미카엘이 노(老) 총대주교를 설득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게 하고 거기서 다시 대관받으려 함 |
| 1261년 | 파키메레스 역사 | 황제가 도성 방어를 위해 밖의 병력을 도성 안에 들이고 가벼운 무장 병사를 많이 배치, 황제 본진의 기병은 출격 대비 대기 |
| 1267년 | 파키메레스 역사 | 1267년 5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거의 개기에 가까운 일식이 보임(12분 가림) |
| 1273년 | 파키메레스 역사 | 황제 쪽이 라틴인과 성찬 예식에서 교통하고 교황 이름을 언급하기로 합의하는 조건을 적음 — 라틴인이 도시를 쥐고 있는 동안 그들을 돕지 않는다는 단서 달림 |
| 1273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샤를 위협이 치워져 황제가 라틴 원정을 미뤄도 된다고 여김 — 교회 분열을 말하는 쪽의 구실이 없어졌다는 대목 |
| 1274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사절이 화해를 전해 오자 총대주교 면직과 교황 이름의 공개 낭송이 이어짐 |
| 1274년 | 파키메레스 역사 | 교회에서 부제가 교황을 공식 호명 — 그레고리오를 사도좌 수석 주교이자 보편 교황으로 선포 |
| 1275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베쿠스가 성령강림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서품됨 |
| 1276년 | 파키메레스 역사 | 황제가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샤를의 계획을 몰래 캐물음 |
| 1282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에 맞서 카를로를 없애려는 음모 — 사람들을 선동, 카를로 생존 중 |
| 1282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미카엘 황제 유골을 셀림브리아에서 옮겨 불가리아 살해자(바실리우스 2세) 무덤 맞은편에 안치 |
| 1283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요셉 총대주교가 3월에 죽어 성 바실리오스 수도원에 묻힘 |
| 1283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전 총대주교 아타나시오스가 1월 15일 저녁 황제를 알현하러 감 |
| 1289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수도사 아타나시오스를 사르디스 주교로 정하고 황제 고해 신부로 발표함 |
| 1289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아타나시오스가 주교·수도사와 함께 나와 황제를 맞이함 — 총대주교 복귀 장면 |
| 1294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안드로니코스의 맏아들 미카엘과 샤를의 손녀 카테리나의 혼담 — 이탈리아 사절 세르 피에트로가 대표로 옴, 전날 저녁부터 혼례 의식 시작 |
| 1294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불화가 최고조 — 서로 증오가 격렬 |
| 1296년 | 파키메레스 역사 | 베네치아 장선 75척이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기습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 일요일 |
| 1296년 | 파키메레스 역사 | 제노바 배들과 베네치아 배들이 서로 쫓고 쫓기는 해상 추격 — 베네치아 배가 가까이 다가옴 |
| 1296년 | 파키메레스 역사 | 12월 말 말다툼이 무력 충돌로 번짐 — 제노바인들이 흥분해 무장하고 도시에 있던 사람들을 공격하려 함 |
| 1324년 | 조반니 빌라니 「신연대기」 | 타타르 기병 30만이 2월 그리스로 들어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까지 약탈, 4월까지 머묾, 15만여 명이 죽거나 노예로 잡힘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안드로니코스 3세(젊은 황제) 이야기를 끝내고, 아홉 살 된 아들 요하네스가 남은 자리를 말함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남편 장례 뒤 사흘 만에 황후 안나가 궁정으로 돌아옴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총대주교와 주교들이 선황의 유언서(코디칠로스)를 내놓음 — 아내와 자식을 위한 지시가 적혀 있다고 함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아포카우코스와 총대주교가 황후를 따로 찾아가 칸타쿠제노스의 권한을 거두라고 설득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가 황후와 측근 앞에 나서서 연설을 시작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후 안나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칸타쿠제노스가 듣고, 아포카우코스가 다시 음모를 꾸밈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가 비잔티온을 떠나 트라키아 도시들로 향함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풀려난 아포카우코스가 비잔티온으로 돌아옴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총대주교가 교회 자리를 떠나 궁정에 머물며 황후 곁에서 아포카우코스와 함께 움직임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의 친지와 측근들이 모여 총대주교와 아포카우코스에게 사절을 보내 해를 가하지 말라고 요청 — 이어 군중과 충돌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의 어머니가 부당하게 감옥에 갇히고 그 집이 헐림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총대주교 쪽이 지방과 도시마다 칸타쿠제노스 지지자들에 대한 파문·금지 서신 다발을 보냄 |
| 134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의 병사 일부가 비잔티온 시민의 초대를 받고 비잔티온 쪽으로 넘어감 |
| 1343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비잔티움과 트라키아의 로마 도시들이 곡식 부족으로 굶주림 |
| 1345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아포카우코스가 비잔티온 옛 궁 안에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살해됨 |
| 1345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어린 황제 앞 공개 논쟁 — 그레고라스가 팔라마스의 신적 본질·효능 구분을 조목조목 반박 |
| 1345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어린 황제가 그레고라스 편으로 판정했으나 판결을 공개하지 않음 — 칸타쿠제노스가 팔라마스 쪽이라 미룸 |
| 1345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팔라마스를 두고 종무회의(synodus)가 열림 — 편자 주 기록 (본문에는 회의 명시 없음) |
| 1347년 | 둑카스 「역사」 | 칸타쿠제노스 군이 도시에 들어서고 궁에 갇힌 안나 황후와 어린 황제가 항복함. 칸타쿠제노스는 투르크 군에 선물을 주어 돌려보내고 사위 오르한에게 감사함 |
| 1347년 | 둑카스 「역사」 | 요한 5세와 칸타쿠제노스의 딸 헬레나의 혼례, 블라케르나이 성모 성당에서 대관. 칸타쿠제노스도 공동황제로 즉위, 아들 마태오스는 전제군주로 선포됨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 황제가 안나 쪽 사절을 돌려보냄 — 성채를 힘으로 차지할 수 있으나 그 뜻을 버렸다고 말함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다음 날 칸타쿠제노스 쪽 병사·지휘관들이 몰래 성채를 갑자기 공격 — 낮 무렵 투척 무기와 불로 블라헤르나이 신전 쪽 성문에 불을 지름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무장한 무리가 뚫고 들어가 성채의 바다 쪽 부분을 차지하고 주민 재산을 약탈 — 황제가 사람을 보내 공격을 말림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안나 황후가 밤을 지새운 뒤 아침 회의에서 사절을 보내 화해를 청함 — 용서는 빌지 않고 권한을 요구하다가, 칸타쿠제노스를 공동황제로 받아들이되 자신이 앞선다는 조건으로 물러섬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가 총대주교 요하네스를 쫓아내고, 비잔티움 궁에 가둬 감시하게 함.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베네치아 함대 지휘관이 에우보이아를 떠나 비잔티온으로 돛을 올림, 황제가 그곳에 오기를 기다림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비잔티온에 베네치아 해군 1만8천 명 이상이 모여 식량 값이 두 배로 뛰고, 베네치아 지휘부가 물자 부족에 몰림 |
| 1347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저자 그레고라스가 감금 중 극심한 억압 속에 놓임 (회고 대목) |
| 1348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팔라마스가 디디모테이콘에서 불려와 비잔티움으로 달려와, 교리 논쟁이 시작됨. |
| 1348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라틴 갈라타이인이 비잔티움에 전쟁을 걺. 뚜렷한 명분은 없었고, 비잔티움의 해운과 세입이 커질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본문이 풀이함. |
| 1348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라틴인이 나흘 동안 비잔티움 해안 전체에 불을 지르고, 바다에 있던 배와 끌어 올린 배, 새로 짓던 삼단노선까지 태움. |
| 1348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라틴인이 큰 배 여러 척에 발판과 장대를 세워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다 쪽 성벽 위로 올리려 함 — 수비 측이 돌과 화살로 막아 냄 |
| 1348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가 시민을 모아 재정 부족과 전 시기 약속 불이행을 질책 — 시민들은 함대 비용을 내기로 약속 |
| 1349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비잔티움 수병들이 라틴 대형 수송선을 공격해 불태움 — 불길이 밤새 바다 위로 치솟음 |
| 1349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라틴 함대가 비잔티움 함대를 에워싸 공격 — 배가 뒤집혀 수많은 병사가 바다에 빠짐 |
| 1350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총대주교 이시도로스가 오랜 설사병 끝에 사망 |
| 1350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팔라마 측이 후임 총대주교 자리에 아토스산 수도자 칼리스토스를 불러와 세움 |
| 1350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와 황후가 그레고라스를 재물·직위로 회유했으나 그레고라스가 거절하며 반대 입장을 밝힘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봄, 베네치아 삼단노선 14척이 비잔티움 항구에 도착 — 베네치아·카탈루냐·비잔티움 연합이 흑해 입구에서 제노바 상선을 나포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가 트라키아 주교 22명만 소집해 공의회를 열려 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그레고라스가 공의회 전에 수도복을 받아 입고 궁정 출입을 끊기로 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공의회 날 정교회 쪽 인사들이 궁에 들어갔으나 궁정 입구에서 기다리게 함 — 팔라마파는 궁 안에서 식사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가 모호한 맹세를 하고, 그레고라스 쪽 발언이 이어지자 말을 막으며 입을 다물라고 위협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 칸타쿠지노스가 칙령으로 그레고라스를 공의회에 소집한 날(5월 27일)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와 팔라마스가 논쟁을 하루에 끝내려 하자, 그레고라스가 공의회에서 연설하고 황제가 말을 끊음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주교 모임에서 황제·총대주교·주교들의 공동 표결로 팔라마스의 본질과 작용 구분 교리가 공표됨. 그레고라스는 신성모독이라 비난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주교들과 총대주교가 그레고라스 편 사람들에게 일어나 손을 대기 시작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 칸타쿠제노스 임석 궁중 공의회 첫 회의: 그레고라스가 팔라마스의 타보르 빛 교리를 반박하고, 황제 쪽에서는 궁중에서 황제 뜻에 맞서지 말라는 경고가 나옴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첫 회의를 해산하면서 사흘 뒤 다시 모이기로 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회의 뒤 군중이 팔라마스를 찾아 해치려 하자 팔라마스가 몸을 숨김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이튿날 아침 팔라마스가 황제에게 가서, 그레고라스 쪽이 도시에서 소동을 부추겼다고 분노를 쏟음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사흘째 회의 전 팔라마스 쪽이 그레고라스를 돈과 약속으로 회유하려 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가 회의 중 침실 밖으로 나가 팔라마스·주교들과 몰래 대책을 의논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가 재산 몰수를 위협하고, 다음 회의에 오는 자가 잡히면 감옥으로 보낸다고 선포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그레고라스가 일어나 회의장을 나오고, 일행도 따라 나감(황제는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 명령)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팔라마스가 황제에게 그들을 풀어 주라고 권해, 그레고라스 일행이 물러나게 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공의회 세 번째 회의 끝 — 열 개 항목 중 셋만 검토됐고 그 셋에서 팔라마스가 공개적으로 졌으나 회의는 끝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밤사이 고위 인사들이 다음 회의를 모의하고 대중 회의를 열어 판결 — 그레고라스 쪽은 말을 봉쇄당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네 번째 회의 — 그레고라스가 장 4를 읽기 시작하자 팔라마스가 격분해 주교들 사이에 소란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총대주교·주교들이 공동 칙령으로 신적 활동(operatio)은 본질과 구분된다고 선포 — 그레고라스는 이를 신성 모독으로 비판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밤 깊어 횃불을 켠 뒤 총대주교와 주교들이 그레고라스 쪽에 달려들어 손을 댐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주교 두 명이 습격당해 옷이 찢기고 주교 신분 표장을 빼앗김, 수염이 뽑힘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그레고라스의 제자들을 힘으로 떼어 놓고 감옥에 넣음 — 남은 제자는 협박으로 관계를 끊게 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안티오키아 관할 주교(티레) 한 명이 회의에서 무례하게 쫓겨나 이후 회의와 절연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며칠 뒤 그레고라스를 집에 가둬 말하기·쓰기·듣기를 모두 금함 (무기한 침묵령)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총대주교·주교·사제 전원이 긴 문서(톰스)에 자필 서명 — 찬성은 서명, 반대하던 이들은 말로만 반대하거나 서명만 함, 서명 않으면 처벌 위협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가 직접 톰스를 제단 위에 올려 바치는 의식 — 팔라마 쪽이 황제에게 권해 이루어짐 (점쟁이들의 꿈 풀이가 황제를 움직였다고 그레고라스가 주장)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톰스 서명 뒤 며칠 만에 제노바인(갈라타 거주)이 비잔티온 성벽 밖의 저택들을 불질러 전소시킴 — 시민들이 항구 문을 막고 성벽 밖 해안에 해자를 파는 계기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 칸타쿠젠노스가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해자를 파서 비잔티온 바다 쪽 성벽을 둘러싸게 함 — 제노바 공격 대비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황제와 총대주교가 보낸 사신(원로·귀족, 주교·학자들)이 그레고라스 집에 옴 — 새 톰스·새 칙령에 동의하고 팔라마의 글을 함께 제출하라고 요구, 그레고라스는 거부하고 사신들은 빈손으로 돌아감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사신들이 팔라마에게 글(libelli)을 내라 하자 모두 함께 거부 — 팔라마는 어떤 글로도 참회를 적어 주지 않겠다고 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팔라마가 분노해 황제에게 가서, 그레고라스에게 글을 넘기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새 칙령과 판결문을 몰래 여러 곳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레고라스와의 접촉은 귀나 눈으로도 금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그레고라스의 집 문에 빗장을 더 달고, 앞·뒤·좌우에 감시인을 세우고 이웃을 감시자로 씀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그레고라스의 축일 설교가 팔라마스 파를 격분시킴 — 그들이 설교 전체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음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팔라마스 파가 그레고라스에게 황제의 칙령을 거스르지 말라고 경고함 |
| 1351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그레고라스를 다시 더 엄하게 가둠 — 문에 빗장을 걸고 간수를 더 엄한 자로 바꿈 |
| 1353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가 오레스티아스에 있는 사이 팔라이올로고스가 배 18척(단노선·이중노선)과 삼단노선 1척으로 비잔티온 어귀에 나타나 도성을 위협 |
| 1353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칸타쿠제노스의 아들 마타이오스가 방패 위에 올려져 왕으로 선포됨(로마 궁정) |
| 1353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칼리스투스 축출 며칠 뒤 헤라클레이아 페린투스 출신 필로테오스 코키노스가 총대주교좌를 얻음 |
| 1354년 | 둑카스 「역사」 | 밤에 호데게트리아 문 앞에서 기름 항아리를 깨뜨려 소음을 내는 꾀로 문지기를 유인, 무장 500이 삼단노선에서 나와 성에 침입. 새벽에 요한 파라이올로고스 만세를 외치며 시민이 모임 |
| 1354년 | 둑카스 「역사」 | 칸타쿠제노스가 제위를 내려놓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함 (아토스 산) |
| 1354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밤 지진으로 저자가 갇힌 방이 흔들려 벽 일부와 책들이 무너짐 |
| 1354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겨울 한밤 팔라이올로고스가 테네도스에서 사흘 만에 몰래 도성 안으로 들어옴 — 이중노선 2척·단노선 11척으로 해 뜨는 쪽 항구 통과 |
| 1354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며칠 뒤 칸타쿠제노스가 궁을 나와 수도사 옷을 입고 아내 에우게니아와 함께 망가나 수도원으로 피함 |
| 1354년 |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로마사」 | 왕이 몰래 비잔티온으로 돌아가 왕비를 찾아감 |
| 1369년 | 둑카스 「역사」 | 칸타쿠제노스가 정사를 홀로 맡는 가운데, 향락에 빠진 사위 요한 5세를 책망하자 요한이 삼단노선 두 척으로 이탈리아로 떠남 |
| 1373년 | 둑카스 「역사」 | 무라드의 아들 쿤투제스와 요한의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아버지를 몰아낼 음모를 꾸밈. 무라드가 쿤투제스의 눈을 멀게 하고 안드로니코스도 같게 하라고 요구 |
| 1373년 | 둑카스 「역사」 | 요한이 안드로니코스와 어린 손자 요한의 눈을 멀게 하고, 마누엘을 공동황제로, 테오도로스를 라케다이몬 군주로 세움. 안드로니코스는 아네마스 탑에 가둠 |
| 1376년 | 둑카스 「역사」 | 탑에서 탈출한 안드로니코스가 갈라타 제노바인의 도움으로 아버지와 전투를 벌인 끝에 도시에 들어가 황제로 선포되고 아버지와 형제들을 같은 탑에 가둠 |
| 1390년 | 둑카스 「역사」 | 바예지드가 조공과 요한의 아들 한 명을 100명 병사와 함께 보내라고 요구. 마누엘이 파견되어 바예지드 밑에서 복무. 바예지드는 곡물 반입을 막고 함대 60척으로 키오스를 불태움 |
| 1390년 | 둑카스 「역사」 | 요한이 황금문 방비를 쌓아 올림. 옛 성당(모든 성인·40인 순교자·성 모키오스)의 석재를 헐어 가져다 씀 |
| 1391년 | 둑카스 「역사」 | 바예지드가 황금문 방비를 허물라 명하고 어기면 프루사에 있는 마누엘의 눈을 멀게 하겠다고 위협. 통풍으로 누운 요한이 방비를 허물었으나 곧 죽음 |
| 1394년 | 둑카스 「역사」 | 바예지드가 도시를 봉쇄: 사방에 군사 1만 이상을 두어 반출입을 막자 도시에 기근이 닥치고, 시민은 땔감이 없어 높은 집을 헐어 불을 땜 |
| 1395년 | 둑카스 「역사」 | 마누엘이 교황과 프랑스·헝가리 왕에게 도시가 포위되어 굶주린다고 알리고 도움을 청함. 도움이 없으면 신앙의 적에게 넘어간다고 경고 |
| 1399년 | 둑카스 「역사」 | 바예지드가 도시를 요구하고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요한(셀림브리아)을 앞세워 마누엘 퇴위를 압박. 시민 소요 속에 마누엘이 요한을 도시에 들이기로 하고 아내·자녀와 삼단노선으로 도시를 떠남 |
| 1399년 | 둑카스 「역사」 | 요한 7세가 입성하여 제위에 올라 바예지드의 조건대로 도시에 투르크 재판관을 두고 셀림브리아를 바예지드에게 넘김 |
| 1402년 | 둑카스 「역사」 | 봄, 해가 쌍둥이자리를 지날 때 서쪽 하늘에 밝은 혜성이 나타나 가을 분점까지 이어짐. 두카스는 전쟁의 징조로 서술 |
| 1403년 | 둑카스 「역사」 | 마누엘이 비잔티온으로 돌아와 조카에게서 정권을 되찾음. 바예지드의 장남 무슬림(술레이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와 마누엘의 발 앞에 엎드려 아들이 되겠다고 서약 |
| 1411년 | 둑카스 「역사」 | 모세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 기계를 마련하고 테살로니케를 공격, 마누엘이 옮겨 놓은 주민이 떠난 도시들을 불태움 |
| 1414년 | 둑카스 「역사」 | 메흐메트의 아들 무라드는 이후 아마시아로. 한편 마누엘이 아들 요한에게 러시아 공주를 신부로 맞이하고 안나로 개명, 3년 뒤 역병으로 안나 죽음 |
| 1417년 | 둑카스 「역사」 | 볼모로 있던 바예지드의 아들이 요한 황제와 함께 공부하다 역병 중 세례를 청해 요한 황제가 대부가 됨. 이튿날 죽어 스투디오스 수도원에 안치 |
| 1419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요한 8세가 몬페라토 후작의 딸 소피아와 혼례, 성 소피아에서 대관식 |
| 1420년 | 둑카스 「역사」 | 메흐메트가 무스타파 인도를 요구하나 마누엘은 거부하고, 두 사람을 감옥에서 내보내지 않겠다고 맹세. 무스타파는 렘노스로 보내져 연 30만 아스프로스 생활비를 메흐메트가 대기로 합의 |
| 1421년 | 둑카스 「역사」 | 마누엘이 사절을 이탈리아에 보내 몬페라토 후작의 딸을 요한에, 말라테스타 백작의 딸을 테오도로스에게 맞이함. 요한·테오도로스 혼례 거행 |
| 1421년 | 둑카스 「역사」 | 마누엘이 무라드에게 사절을 보내 유언대로 어린 두 왕자를 인도하라 요구하자 파샤는 이슬람 아이를 그리스도교도 손에서 키울 수 없다며 거부. 마누엘은 무스타파를 풀어줄 구상 |
| 1422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무라트 2세가 군대를 보내 6월 8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6월 15일 본인이 도착해 공격, 9월 6일 성과 없이 철수 |
| 1422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오스만 선발군이 6월 10일 콘스탄티노폴리를 에워싸 봉쇄 시작 |
| 1422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무라트 본대가 도착해 명령으로 성벽 바깥에 흙 제방(agger)을 쌓음 |
| 1422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8월 24일 오스만 대규모 공격이 격퇴됨 (오스만 측 천여 명 사상, 방어 측 부상 100 미만·사망 30 이하) |
| 1425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마누엘 2세 황제 사망 — 7월 21일, 죽기 이틀 전 수도사로 서품,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묻힘 |
| 1426년 | 둑카스 「역사」 | 요한이 몬페라토 출신 황후를 외모 탓에 멀리하자 황후가 갈라타의 제노바인과 짜고 탈출, 배로 이탈리아로 떠나 친정에서 수도원 생활 |
| 1426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소피아 황후가 남편 요한 8세를 떠나 고향(몬페라토)으로 돌아감 |
| 1427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요한 8세가 트레비존드의 콤니노스 가문 공주와 혼인, 황후(Augusta)로 선포 |
| 1436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파라스폰델리스 딸 조에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와 데메트리오스와 혼인 |
| 144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데메트리오스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
| 144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콘스탄티노스 데스포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펠로폰네소스로 감 |
| 1448년 | 둑카스 「역사」 | [색인] 요한 황제가 죽고 전제군주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 황제 자리에 오름 |
| 1448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황제 요한 8세 사망(10월 31일) |
| 1452년 | 둑카스 「역사」 | [색인] 콘스탄티노스가 교황에게 원조를 청하고 교회 합동을 완수. 이시도로스 추기경이 교황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와 성소피아에서 합동 예배 |
| 1452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메흐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도착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
| 1453년 | 둑카스 「역사」 | [색인] 메흐메트가 거대한 청동포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로 옮기게 하고, 투르크군이 흑해 연안 도시를 점령, 셀림브리아를 빼고 프로폰티스 연안 소도시를 차지 |
| 1453년 | 둑카스 「역사」 | [색인] 성이 함락: 성이 뚫리자 유스티니아니는 부하를 철수시키고 갈라타 사람과 배 몇 척이 도망. 투르크가 시민을 포로로 끌고 가고, 대공(노타라스)이 사로잡혀 감시당함 |
| 1453년 | 둑카스 「역사」 | [색인] 메흐메트가 도시에 입성해 성소피아로 가서 이맘에게 기도를 올리게 함.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머리를 알아본 뒤 아우구스테이온 기둥에 매닮 |
| 1453년 | 둑카스 「역사」 | [색인] 메흐메트가 노타라스를 위로하고 귀족 이름을 적게 함. 노타라스 아내를 찾아 위로하나 연회에 막내아들을 보내라 하자 거부, 메흐메트가 아들을 죽이게 하고 노타라스도 참수. 귀족은 몸값을 치른 뒤 모두 살해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오스만군이 길이 100피트·너비 50피트의 다리를 놓고 그 위에 공성탑을 얹은 뒤 배를 대어 항구 쪽 성벽을 치기 시작함.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황제가 회의를 열어 성벽 구역을 지휘관들에게 나눠 맡김. 테오필로스 팔라이올로고스에게는 셀림브리아 문 근처를 맡김.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베네치아인 자코모 코코가 배 세 척(그리스 불 장치)으로 야간 기습을 시도했으나 실패. 청년 40명이 죽고, 오스만 쪽이 다음 날 아침 전원 처형. 이에 황제는 포로 튀르크인 260명을 처형하게 함.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 사이에 다툼이 생김.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오스만 쪽 큰 헬레폴리스(공성탑)가 성 테오도로 언덕(갈라타 맞은편)에서 항구 입구의 기독교 쪽 주력선 한 척을 불태워 가라앉힘. 그 전에 배들은 갈라타 쪽으로 물러났음.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메흐메트가 명령(5월 27일 저녁: 금식·목욕)을 내린 뒤 다음 날 저녁 병사들에게 연설. 도시를 사흘간 병사들 것으로 한다고 약속.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두 번째 닭 울음 무렵 신호 없이 총공격 시작. 헬레폴리스·사다리·배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두 시간 가까이 격전.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제노바 지휘관 유스티니아니가 오른발에 화살을 맞고 자리를 떠나 갈라타로 건너가 그곳에서 죽음. 지휘관 이탈로 병사들이 동요.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예니체리 하산(Chasanes)이 약 30명을 이끌고 성벽을 올라 방어군을 밀어냄. 하산은 돌에 맞아 쓰러짐. 이후 오스만군이 성벽을 차지하고, 바깥 성벽을 버린 방어군이 문으로 몰려 도시 안으로 밀려 들어감.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오스만군이 성 로마노스 문 근처에 큰 헬레폴리스를 세워 성벽을 무너뜨리고 그 틈으로 도시에 처음 들어감.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크레타 선원들이 탑 두 곳에서 버티다가, 배와 짐을 가지고 나가게 해 준다는 약조에 따라 내려옴. 설득에 시간이 걸림.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오스만군이 도시 전체를 장악. 원문은 함락 시각을 셋째 날 두 번째 시 반으로 기록.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함락 뒤 약탈과 포로 잡기. 여성과 성직자를 교회에서 끌어냄, 성물 파괴와 약탈이 이어짐(원문 서술).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황제(원문 imperator·dominus meus)가 전사. 시신은 황제용 장화와 금 독수리 장식으로 확인되어 황제 예법대로 묻힘. 원문은 생애 49년 3개월 20일로 기록.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노타라스 대공이 금·보석 등 재물을 메흐메트에게 바치며 목숨을 빎. 메흐메트는 그 자리에서 감옥에 가둠. 다음 날 다시 불러 캐묻고 질책.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메흐메트가 노타라스와 아들 둘을 광장('마른 언덕 광장')에서 처형. 아들들을 먼저 죽이고 노타라스 본인도 처형.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메흐메트가 알리 파샤를 탑에 가둔 뒤 며칠 만에 죽임. 원문상 이유는 도시 공격을 말렸기 때문.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메흐메트가 승리를 축하하며, 숨었던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자기 관습과 종교대로 살라고 공포. 총대주교도 뽑게 함.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주교·성직자들이 학자 조르지오스 스콜라리오스(당시 평신도)를 뽑아 총대주교로 세움. 이름은 겐나디오스로 바뀜. 메흐메트가 총대주교의 지팡이(pedum)를 줌. |
| 1453년 | 스프란체스 「연대기」 | 메흐메트가 카파·트라페주스·시노페·아스프로카스트로에서 이주민을 데려와 도시를 다시 채움(원문 튀르크 말 'surgunid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