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중국 · 좌표: 34.700, 112.600 · 사건 286건
| 해 | 사료 | 내용 |
|---|---|---|
| 기원전 1045년 | 사기(史記) 본기 | 武王이 낙수 굽이(洛汭)에서 이수 굽이(伊汭)에 이르는 곳을 하(夏) 옛 터로 보고 雒邑에 주(周)의 거처를 경영하고 떠남 전승 |
| 기원전 1038년 | 사기(史記) 본기 | 成王이 豐에 있으며 召公에게 武王의 뜻대로 洛邑을 다시 경영하게 하고 周公이 점쳐 九鼎을 안치함 |
| 기원전 770년 | 사기(史記) 본기 | 平王이 즉위하여 戎寇를 피해 동쪽 雒邑으로 천도함 |
| 기원전 606년 | 사기(史記) 본기 | 定王 원년 楚 莊王이 陸渾之戎을 치고 洛에 머물며 九鼎의 무게를 물었으나 王孫滿의 대답에 군대를 물림 전승 |
| 기원전 403년 | 사기(史記) 본기 | 威烈王 23년 九鼎이 진동하고 韓·魏·趙를 제후로 임명함 |
| 기원전 403년 | 자치통감 | 주 위열왕이 진(晉)의 대부 위사·조적·한건을 처음으로 제후에 책봉함 (삼진 분립을 인정) |
| 기원전 307년 | 자치통감 | 진 무왕이 맹열과 정(鼎)을 들다 맥이 끊겨 죽자 연에 인질로 있던 이복동생 직(소양왕)이 맞아져 즉위 |
| 기원전 293년 | 사기(史記) 본기 | 白起가 伊闕에서 韓·魏를 공격해 24만 명을 베고 公孫喜를 사로잡음 |
| 기원전 256년 | 사기(史記) 본기 | 西周가 秦을 배반하고 합종해 伊闕로 나서려 하자 秦 昭王이 장군 摎를 보내 쳤고, 西周君이 秦에 가서 읍 36곳과 3만 인구를 바침 |
| 기원전 255년 | 사기(史記) 본기 | 赧王이 죽자 周 백성이 동쪽으로 달아났고 秦이 九鼎 등 보물을 가져가 西周公을 憚狐로 옮김 |
| 기원전 249년 | 사기(史記) 본기 | 7년 뒤 秦 莊襄王이 東周를 멸해 東西周가 모두 秦에 들어가 周의 제사가 끊김 |
| 기원전 205년 | 한서(漢書) 제기 | 낙양에서 신성 삼로 동공의 간언을 듣고 한왕이 의제의 상을 선포하고 3일 곡(哭) — 항우 토벌을 제후에게 알림 |
| 기원전 205년 | 사기(史記) 본기 | 漢王이 臨晉에서 黃河를 건너 魏를 따르게 하고 雒陽에 이르러 義帝 발상(發喪)을 선포하고 제후에게 楚 토벌을 호소 |
| 기원전 202년 | 한서(漢書) 제기 | 황제가 서쪽 낙양에 도읍하고, 5월에 병사를 해산해 귀향시킴 |
| 기원전 202년 | 사기(史記) 본기 | 高祖가 雒陽에 도읍하려다 劉敬·張良의 건의로 그날 수레를 몰아 關中에 도읍하기로 함 |
| 25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낙양에서 포위된 주유가 성을 들어 항복함 |
| 25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광무제의 수레가 낙양에 들어가 남궁에 머물며 도읍으로 정함 |
| 25년 | 자치통감 | 겨울 10월 계축 광무제가 낙양에 들어가 남궁에 머물고 도읍으로 정함 |
| 26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낙양에 고묘를 세우고 사직을 두며 남쪽 교외에 제단을 세움 |
| 57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광무제가 남궁 전전에서 붕어함(나이 62) |
| 57년 | 자치통감 | 2월 무술 광무제가 남궁 전전에서 승하(62세) — 매일 아침 조회·경서 강론에 쉬지 않아 태자가 건강을 염려했음 |
| 7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백호관에 여러 유생을 모아 오경의 같고 다름을 논의해 백호의주를 지음 |
| 88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장제가 장덕전에서 붕어함(나이 33) |
| 92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두헌이 반역을 꾀하자 화제가 북궁에 행차해 당여를 체포하고 두헌 형제를 봉국으로 보내 자결하게 함 |
| 105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화제가 장덕전에서 붕어하고 태자 융(상제)이 즉위함 |
| 106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상제 붕어 후 등태후가 안제를 맞아 즉위시킴(나이 13) |
| 10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수도에서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이 서로 잡아먹음 |
| 121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등태후가 붕어함 |
| 125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중황문 손정 등 19인이 강경·유안·진달을 베고 제음왕(순제)을 덕양전 서쪽 종 아래서 맞아 즉위시킴 |
| 125년 | 자치통감 | 11월 을묘 환관 손정 등이 서종 아래 모여 옷자락을 잘라 맹세하고 거사를 도모함 |
| 132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사관이 후풍지동동의(지진 감지 기구)를 처음 만듦 |
| 144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순제가 옥당 전전에서 붕어하고 충제가 두 살로 즉위함 |
| 146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대장군 양기가 질제를 짐독으로 시해함 |
| 146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양태후와 양기가 환제를 맞아 남궁에서 즉위시킴(나이 15) |
| 147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전 태위 이고·두교가 옥에 갇혀 죽음 |
| 15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환제가 사예교위 장표로 하여금 양기의 집을 에워싸게 하자 양기 부부가 자살하고 일족이 처형됨 |
| 159년 | 자치통감 | 8월 정축 양기가 선초 등을 의심해 중황문 장혜를 궁에 숙직시키자 구원이 장혜를 잡고 황제가 전전에 나와 상서들을 불러 사태를 밝히며 상서령 윤훈이 부절을 거두고 병기를 든 채 성문을 지키게 함(양기 주살 정변) |
| 166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사예교위 이응 등 200여 명이 당인으로 모함받아 투옥됨(당고) |
| 166년 | 자치통감 | 하내 장성이 점으로 사면을 예측해 아들에게 살인을 시키자 사례교위 이응이 잡아 죽임 — 환관이 장성의 제자 뇌수를 시켜 이응 등이 태학생과 교유하며 조정을 비방한다고 고발하게 함(1차 당고) |
| 167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환제가 덕양전 전전에서 붕어함(나이 36) |
| 168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영제가 12세로 즉위하고 건녕으로 개원함 |
| 168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중상시 조절이 조서를 꾸며 태부 진번·대장군 두무 등을 죽이고 족멸하며 태후를 남궁으로 옮김 |
| 16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중상시 후람이 사주해 우방·두밀·이응 등을 구당(鉤黨)으로 몰아 옥에 가두니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음 |
| 175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여러 유생에게 오경 문자를 바로잡아 돌에 새겨 태학문 밖에 세우게 함 |
| 178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서저를 열어 관직을 팔기 시작해 관내후부터 입전하게 함 |
| 17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중상시 왕보와 태위 단경이 옥에 갇혀 죽음 |
| 184년 | 자치통감 | 봄 각의 제자 당주가 밀고해 마원의가 낙양에서 거열형 — 조서로 천여 명이 처형되고 기주에서 각을 체포하려 하자 각이 곧바로 일제 봉기를 명해 황건을 표식으로 삼음 |
| 185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남궁에 큰 불이 나 반 달 만에 꺼짐 |
| 188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서원팔교위를 처음 둠 |
| 18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영제가 남궁 가덕전에서 붕어하고 황자 변이 즉위(나이 17)함 |
| 18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중상시 장양·단규 등이 대장군 하진을 죽이자 원술이 동·서궁을 불사르고 환관을 공격함 |
| 18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동탁이 소제를 폐해 홍농왕으로 삼음 |
| 189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헌제가 9세로 즉위하고 영한으로 개원함 |
| 189년 | 자치통감 | 8월 무진 하진이 장락궁에 들어가 태후에게 환관 주살을 청하자 장양·단규가 엿듣고 무리 수십 명과 병기를 들고 측문으로 몰래 들어와 매복함 |
| 189년 | 자치통감 | 9월 계유 동탁이 백관을 모아 '황제가 암약하니 진류왕을 세우겠다' 하고 이의를 막겠다 협박 — 공경들이 두려워 응답하지 못함 |
| 190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동탁이 낙양 궁묘와 민가를 불사름 |
| 190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동탁이 천자를 長安으로 옮기고 洛陽 궁실을 불태움 |
| 196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헌제의 수레가 낙양에 이르러 옛 중상시 조충의 집에 듦 |
| 196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曹操가 洛陽에 이르러 京都를 호위, 천자가 節鉞을 주고 錄尚書事로 삼음 |
| 196년 | 자치통감 | 경자 양봉·한섬이 어가를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가 7월 갑자 낙양에 이르러 옛 중상시 조충의 집에 거함 — 8월 남궁 양안전에 들어가고 장양이 자기 공이라 전각 이름을 양안이라 함 |
| 196년 | 자치통감 | 한섬이 공을 믿고 전횡하자 동승이 은밀히 조조를 불러 — 조조가 낙양에 이르러 한섬·장양의 죄를 아뢰고 신해일 사례교위·녹상서사를 겸임, 상서 풍석 등 3인을 죽임 |
| 220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曹操가 洛陽에서 죽음(66세) |
| 220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처음 洛陽宮을 짓고 洛陽에 행차 |
| 226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曹丕가 嘉福殿에서 죽음(40세), 6월 首陽陵에 장사 |
| 239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明帝가 河內에서 돌아온 司馬懿에게 後事를 부탁하고 嘉福殿에서 죽음(36세) |
| 249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황제가 高平陵에 참배하는 사이 司馬懿가 曹爽 등을 파면, 曹爽 일당을 삼족 멸함 |
| 249년 | 자치통감 | 太傅 司馬懿가 황태후의 령으로 성문을 모두 닫고 군을 거느려 武庫를 점거하고 洛水 浮橋에 군을 내보냄 |
| 254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司馬師가 皇太后 명으로 齊王 曹芳을 폐위해 齊로 돌려보냄 |
| 254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高貴鄉公 曹髦가 洛陽에 들어와 太極前殿에서 황제로 즉위 |
| 260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高貴鄉公이 병사를 이끌고 거병했다가 雲龍門 앞에서 해를 입어 죽음(20세) |
| 260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常道鄉公 曹奐이 洛陽에서 太極前殿에 즉위(陳留王) |
| 260년 | 자치통감 | 甲寅 常道鄉公이 洛陽에 들어가 그날 황제위에 올라 15세로 대사면하고 개원 |
| 264년 | 자치통감 | 劉禪이 온 집안을 데리고 洛陽으로 옮겨 가는데 혼란한 중에 郤正과 張通만 처자를 버리고 따름 |
| 265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조서로 南郊에 단을 설치해 晉 嗣王에게 황제 璽綬를 보내 선위, 金墉城으로 옮김(魏 멸망) |
| 265년 | 자치통감 | 12월 壬戌 魏帝가 晉에 선위하고 甲子에 金墉城으로 나옴 |
| 266년 | 진서(晉書) 제기 | 위 황제의 선양을 받아 낙양에서 단을 쌓고 즉위, 대사면·개원(泰始). 서진 건국 |
| 276년 | 진서(晉書) 제기 | 대역병으로 낙양 사망자가 절반을 넘음 |
| 280년 | 진서(晉書) 제기 | 孫皓를 歸命侯로 봉함. 낙양에서 군신이 모인 자리에 孫皓를 올림 |
| 290년 | 진서(晉書) 제기 | 武帝가 含章殿에서 55세로 붕어 |
| 290년 | 진서(晉書) 제기 | 惠帝 즉위, 賈氏를 황후로 세우고 楊駿이 태부로 보정 |
| 291년 | 진서(晉書) 제기 | 賈后 일파가 太傅 楊駿과 그 일족을 삼족까지 주살 |
| 291년 | 진서(晉書) 제기 | 賈后가 조서를 꾸며 楚王 瑋에게 汝南王 亮·衛瓘을 죽이게 한 뒤 瑋도 주살 |
| 300년 | 진서(晉書) 제기 | 皇太子 遹을 서인으로 폐하고 세 아들과 함께 金墉城에 가둠 |
| 300년 | 진서(晉書) 제기 | 趙王 倫·梁王 肜이 賈后를 폐하고 張華·裴頠를 죽임(八王의 난 격화) |
| 300년 | 진서(晉書) 제기 | 淮南王 允이 趙王 倫 토벌에 실패하고 피살 |
| 301년 | 진서(晉書) 제기 | 趙王 倫이 제위를 찬탈하고 惠帝를 金墉城으로 옮겨 太上皇이라 함 |
| 301년 | 진서(晉書) 제기 | 王輿가 궁에 들어가 孫秀 등을 참하고 惠帝를 복위시킴 |
| 303년 | 진서(晉書) 제기 | 長沙王 乂가 惠帝를 받들고 齊王 冏을 공격해 죽임 |
| 303년 | 진서(晉書) 제기 | 河間王 顒·成都王 穎이 長沙王 乂를 치려 張方·陸機 등을 보내 낙양을 압박 |
| 303년 | 진서(晉書) 제기 | 張方이 낙양에 들어와 淸明·開陽 두 문을 불태워 수만 명이 죽음 |
| 303년 | 진서(晉書) 제기 | 東海王 越이 長沙王 乂를 잡아 金墉城에 가두고 곧 張方이 죽임 |
| 304년 | 진서(晉書) 제기 | 張方이 낙양을 크게 약탈하고 長安으로 돌아감 |
| 306년 | 진서(晉書) 제기 | 祁弘 등이 惠帝를 받들어 낙양으로 환궁(牛車) |
| 306년 | 진서(晉書) 제기 | 惠帝가 顯陽殿에서 48세로 붕어(독살설) |
| 309년 | 진서(晉書) 제기 | 劉聰이 洛陽 西明門에 이르렀으나 東海王 越이 宣陽門 밖에서 대파 |
| 309년 | 자치통감 | 가을 8월 漢主 淵이 楚王 聰 등에게 洛陽을 진공하게 하자 曹武 등이 막았으나 모두 聰에게 패함 |
| 310년 | 진서(晉書) 제기 | 東海王 越이 許昌으로 출병하자 궁에는 수비가 없고 기근이 심해 전각 안에 시체가 널림 |
| 311년 | 진서(晉書) 제기 | 劉曜·王彌가 낙양에 입성(洛陽 함락), 궁묘를 불태우고 3만여 명 사망. 懷帝는 華林園으로 도망했으나 붙잡힘 |
| 328년 | 자치통감 | 己卯 中山公 石虎가 보병 3만으로 성 북쪽에서 서쪽으로 돌아 趙 중군을 공격하고, 石堪·石聰 등이 각각 정기 8천으로 성 서쪽에서 북쪽으로 趙 선봉을 쳐 西陽門에서 대전 |
| 329년 | 진서(晉書) 제기 | 石勒이 洛陽에서 劉曜를 격파하고 사로잡음 |
| 333년 | 자치통감 | 石虎가 태자를 襄國에 남겨 지키게 하고 보기 7만으로 金墉의 朗을 공격, 金墉이 무너져 朗을 사로잡아 발을 자르고 베었으며, 長安을 향해 진군 |
| 365년 | 진서(晉書) 제기 | 慕容恪이 낙양을 함락, 竺瑤는 襄陽으로 도주, 沈勁 전사 |
| 365년 | 자치통감 | 燕 太宰 恪과 吳王 垂가 함께 洛陽을 공격 |
| 384년 | 진서(晉書) 제기 | 翟遼가 苻堅에 배반해 거병, 慕容垂가 가담하여 洛陽의 苻暉를 공격 |
| 390년 | 자치통감 | 西燕主 永이 군을 이끌고 洛陽으로 향하자 朱序가 河陰에서 북으로 황하를 건너 쳐 격파해 永이 上黨으로 달아남 |
| 399년 | 진서(晉書) 제기 | 姚興이 洛陽을 함락, 河南太守 辛恭靖을 사로잡음 |
| 416년 | 진서(晉書) 제기 | 後秦 姚泓의 장수 姚光이 洛陽을 들어 항복 |
| 416년 | 남사(南史) 본기 | 劉裕의 북벌군이 洛陽에 이르러 金墉을 포위, 항복시킴 |
| 423년 | 송서(宋書) 본기 | 북위 장수 달해앙이 금용을 깨고 호뢰를 포위, 모덕조가 한때 격퇴했으나 적이 다시 모임 |
| 423년 | 위서(魏書) 제기 | 낙양에 이르러 석경(石經)을 봄 |
| 423년 | 자치통감 | 북위 우률제가 금용을 공격, 하남태수 왕연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남 |
| 430년 | 북사(北史) 본기 | 安頡이 하수를 건너 宋이 지키던 洛陽을 함락(이어 武牢도 평정) |
| 430년 | 남사(南史) 본기 | 북위군이 金墉城을 함락 |
| 430년 | 송서(宋書) 본기 | 금용성이 북위에 함락됨 |
| 430년 | 위서(魏書) 제기 | 安頡이 낙양을 함락 |
| 430년 | 자치통감 | 북위 낙양·호뢰 수비병이 성을 버리고 물러나 송이 하남 수복 |
| 430년 | 자치통감 | 북위 안힐이 낙양을 함락, 장병 5천여 명 살해(10월) |
| 493년 | 북사(北史) 본기 | 낙양에서 군신이 말 앞에 엎드려 남벌 중지를 청하자 중지하고 천도 계획을 논의 |
| 493년 | 북사(北史) 본기 | 穆亮·李沖·董爵에게 낙양(洛京) 조영을 시작하게 함 |
| 493년 | 위서(魏書) 제기 | 낙양(洛陽)에 이르러 옛 궁 터를 돌아보며 눈물 |
| 494년 | 남사(南史) 본기 | 북위 孝文帝가 洛陽으로 천도 |
| 494년 | 위서(魏書) 제기 | 낙양 서궁에 행차 |
| 495년 | 북사(北史) 본기 | 6궁과 문무 관원이 모두 낙양으로 옮김 |
| 495년 | 위서(魏書) 제기 | 천도한 대인(代人)은 하남 낙양 사람으로 삼고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함 |
| 495년 | 위서(魏書) 제기 | 육궁과 문무 관원이 모두 낙양으로 이주 완료 |
| 496년 | 자치통감 | 북위 태자 순을 폐서인하고 하양 무비성에 유폐(윤월) |
| 497년 | 자치통감 | 북위가 기·정·영·상·제 5주 병마 20만을 내어 입구 준비 |
| 501년 | 위서(魏書) 제기 | 경사에 323방(坊)을 5만 명으로 축조 |
| 515년 | 위서(魏書) 제기 | 宣武帝 식건전에서 붕어(33세) |
| 515년 | 자치통감 | 북위 선무제가 식건전에서 붕어, 태자가 즉위(효명제) |
| 520년 | 위서(魏書) 제기 | 元叉·劉騰이 호태후를 북궁에 유폐하고 정권 장악 |
| 520년 | 자치통감 | 북위 원차·유등이 청하왕 역을 밤중에 죽임 |
| 528년 | 위서(魏書) 제기 | 孝明帝 현양전에서 붕어(19세), 갓난 황녀를 황자라 속여 즉위시킨 뒤 곧 폐함 |
| 528년 | 위서(魏書) 제기 | 葛榮을 낙양으로 압송해 도시에서 참수 |
| 528년 | 자치통감 | 이주영의 호기병이 조정 대신들을 대거 학살(하음의 변) |
| 528년 | 자치통감 | 진경지가 북중성을 지키며 하루 세 차례 열한 번 싸워 큰 피해를 줌 |
| 529년 | 북사(北史) 본기 | 梁의 후원을 받은 北海王 元顥가 낙양에 들어감(황제는 북으로 피난) |
| 529년 | 양서(梁書) 본기 | 위주 원자유가 낙양을 버리고 하북으로 달아나자 원호가 낙양에 입성 |
| 529년 | 양서(梁書) 본기 | 이주영이 원호를 공격해 죽이고 낙양을 되찾음 |
| 529년 | 남사(南史) 본기 | 元顥가 京師(洛陽)에 입성해 建武라 칭제 |
| 529년 | 위서(魏書) 제기 | 元顥가 낙양에 입성(효장제는 하내로 피신) |
| 529년 | 위서(魏書) 제기 | 元顥 패주 후 효장제가 낙양에 돌아와 화림원에 듦, 곧 元顥는 임영 졸병에게 참수 |
| 530년 | 위서(魏書) 제기 | 효장제가 명광전에서 爾朱榮·元天穆을 죽임 |
| 530년 | 위서(魏書) 제기 | 爾朱兆가 황하를 건너 경성을 급습, 황제를 사로잡음 |
| 530년 | 자치통감 | 효장제가 이주영을 궁중에서 살해(9월) |
| 531년 | 위서(魏書) 제기 | 前廢帝 元恭이 선양받아 낙양 태극전에서 즉위 |
| 531년 | 자치통감 | 광릉왕이 세 번 사양한 뒤 즉위(절민제) |
| 532년 | 북제서(北齊書) 제기 | 洛陽에 들어가 節閔帝와 中興主(廢帝)를 폐하고 孝武帝를 세움 |
| 532년 | 양서(梁書) 본기 | 설법호가 원열을 호위해 낙양으로 들어가게 함 |
| 532년 | 위서(魏書) 제기 | 長孫稚가 경사에 들어가 爾朱世隆·彥伯을 도성 거리에서 참수 |
| 532년 | 위서(魏書) 제기 | 出帝 元脩가 동곽 밖에서 즉위, 태극전에 오름 |
| 534년 | 북제서(北齊書) 제기 | 高歡이 河北에서 군을 건너오자 孝武帝가 長安으로 달아나고, 기유일 高歡이 洛陽에 들어가 永寧寺에 머묾 |
| 534년 | 북제서(北齊書) 제기 | 洛陽에서 清河王世子 善見을 세워 孝靜帝로 삼음 — 「魏於是始分為二」(東魏·西魏 분립) |
| 534년 | 북사(北史) 본기 | 孝武帝가 장안으로 달아난 뒤 高歡이 낙양에 들어가 永寧寺에 머묾 |
| 534년 | 위서(魏書) 제기 | 高歡이 낙양에 입성 |
| 538년 | 북사(北史) 본기 | 東魏 侯景 등이 洛陽을 포위하자 文帝와 宇文泰가 동쪽으로 출정 |
| 538년 | 위서(魏書) 제기 | 侯景·高敖曹가 금용성(洛陽)의 獨孤如願을 포위 |
| 538년 | 자치통감 | 서위가 동위 서연주자사 송현을 죽이고 갑사 1만5천 포로, 황하에 빠져 죽은 자 만 단위(하교 전투) |
| 538년 | 자치통감 | 고환이 금용성을 공격, 장손자언이 성을 버리고 불사른 뒤 고환이 금용을 허물고 돌아감 |
| 543년 | 위서(魏書) 제기 | 邙山 전투: 高歡이 宇文泰군을 대파, 6만여 참수·포획 |
| 543년 | 주서(周書) 제기 | 邙山에서 야간 기습으로 高歡 군을 깨뜨렸으나 趙貴 등 좌군이 불리해 밤에 철수 |
| 554년 | 북제서(北齊書) 제기 | 8월 常山王 高演 등이 洛陽 서남에 伐惡城·新城·嚴城·河南城을 쌓음 (9월 황제가 임해 周軍 유인 — 周軍 불출) |
| 564년 | 북제서(北齊書) 제기 | 閏9월 周軍이 세 길(尉遲迥→洛陽, 楊檦→軹關, 權景宣→懸瓠)로 나오고 11월 갑오 尉遲迥이 洛陽을 포위 |
| 564년 | 북제서(北齊書) 제기 | 12월 임술일 太師 段韶가 尉遲迥 등을 크게 깨 洛陽 포위를 풂, 정묘일 황제가 洛陽에 이르러 租賦를 면제 |
| 564년 | 북사(北史) 본기 | 段韶가 尉遲迥 등을 대파해 洛陽의 포위를 풂 |
| 564년 | 북사(北史) 본기 | 尉遲迥이 洛陽을 포위, 宇文憲은 芒山에, 宇文護는 陜州에 주둔(제1차 북제 정벌) |
| 564년 | 북사(北史) 본기 | 北齊군이 하수를 건너 새벽에 洛陽에 닥치자 周軍이 흩어짐, 王雄 전사로 철군 |
| 564년 | 주서(周書) 제기 | 尉遲迥이 洛陽을 포위, 宇文憲은 邙山에 진을 치고 宇文護는 陝州에 주둔 |
| 564년 | 주서(周書) 제기 | 齊軍이 황하를 건너 洛陽에 이르자 周軍이 놀라 흩어지고 王雄이 전사, 楊𢷋도 軹關에서 죽어 철군(1차 정벌 실패) |
| 575년 | 북제서(北齊書) 제기 | 8월 周軍이 洛川에 들어와 芒山에 주둔, 洛城을 압박하고 불붙인 배로 浮橋를 태워 河橋가 끊김. 閏月 高阿那肱이 晉陽에서 방어하러 나가 河陽에 이르자 周軍이 밤에 달아남 |
| 575년 | 북사(北史) 본기 | 北周군이 洛川으로 들어와 芒山에 주둔하고 洛城을 압박, 불배로 부교를 태워 河橋가 끊김 |
| 578년 | 주서(周書) 제기 | 武帝가 鄴·懷州·洛州를 순행하고 懷州에 궁을 두게 함 |
| 579년 | 북사(北史) 본기 | 山東 여러 주 병사를 동원해 洛陽宮을 짓게 함(상시 4만 명) |
| 579년 | 주서(周書) 제기 | 河洛 옛 도읍을 되살리려 山東 군사를 발해 洛陽宮을 짓고 한 번에 4만을 부림 |
| 584년 | 수서(隋書) 제기 | 關內 흉년으로 낙양으로 행차 |
| 594년 | 수서(隋書) 제기 | 關中 대가뭄으로 황제가 호구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먹을 것을 찾아 감 |
| 594년 | 자치통감 | 594년 8월 황제가 백성을 이끌고 먹을 것을 찾아 낙양으로 감 |
| 604년 | 진서(陳書) 본기 | 後主가 隋 仁壽4年 11월 洛陽에서 52세로 죽어 邙山에 장사됨(시호 煬) |
| 604년 | 수서(隋書) 제기 | 煬帝가 낙양에 행차 |
| 604년 | 수서(隋書) 제기 | 伊水·洛水 일대에 東京을 짓겠다는 조서 |
| 605년 | 북사(北史) 본기 | 楊素·楊達·宇文愷에게 東京(낙양) 조영을 명하고 豫州 주민을 옮겨 채움 |
| 605년 | 수서(隋書) 제기 | 楊素·楊達·宇文愷에게 東京 조영을 맡기고 豫州 성 아래 주민을 옮겨 채움 |
| 605년 | 수서(隋書) 제기 | 河南 남녀 100여만을 동원해 通濟渠를 팜(西苑에서 穀·洛水를 黃河로, 板渚에서 黃河를 淮水로) |
| 606년 | 북사(北史) 본기 | 伊闕에서 법가를 갖춰 東京에 들어옴, 端門에서 대사면 |
| 606년 | 수서(隋書) 제기 | 東京이 완공되어 감독자에게 상을 줌 |
| 606년 | 수서(隋書) 제기 | 伊闕에서 법가(法駕) 천승만기를 갖추어 東京에 입성 |
| 606년 | 자치통감 | 606년 정월 신유 동경이 완성되어 장작대장 우문개의 품계를 올림 |
| 606년 | 자치통감 | 606년 3월 경술 황제가 강도를 떠나 4월 경술 이궐에서 법가를 갖추고 천승만기로 동경에 입성 |
| 607년 | 수서(隋書) 제기 | 東都에 도착 |
| 609년 | 수서(隋書) 제기 | 東京을 東都로 개칭 |
| 609년 | 수서(隋書) 제기 | 東都로 행차 |
| 610년 | 북사(北史) 본기 | 미륵불을 자칭하는 도적 수십 명이 建國門으로 들어와 난을 꾸미다 齊王 暕에게 베임 |
| 610년 | 수서(隋書) 제기 | 정월 초하루 새벽 수십 명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建國門으로 들어와 위사의 무기를 빼앗고 난을 꾸밈, 齊王 暕이 베어 죽임 |
| 610년 | 자치통감 | 610년 정월 여러 번방 추장이 낙양에 모이자 단문가에서 백희를 성대히 벌임, 연주자 1만 8천 명 |
| 612년 | 수서(隋書) 제기 | 煬帝가 東都에 도착 |
| 613년 | 수서(隋書) 제기 | 楊玄感이 東都를 압박, 河南贊務 裴弘策이 막다 패함 |
| 613년 | 자치통감 | 613년 가을 양현감이 동도를 포위하자 양군 사람 한상국이 호응해 거병, 현감이 하남도원수로 삼아 열흘 만에 십여만이 모여 군현을 약탈하다 양성에서 현감의 패배를 듣고 흩어짐 |
| 614년 | 수서(隋書) 제기 | 東都에 도착 |
| 615년 | 수서(隋書) 제기 | 東都에 도착 |
| 617년 | 수서(隋書) 제기 | 孟讓이 밤에 東都 외곽에 들어가 豐都市를 불태우고 떠남 |
| 620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진왕 이세민에게 여러 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치게 함 |
| 620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秦王 世民이 王世充 토벌에 출정 |
| 621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왕세충이 동도 낙양을 들어 항복해 하남이 평정됨 |
| 621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秦王 世民이 王世充을 사로잡아 바침 |
| 657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洛陽宮을 東都로 삼음 |
| 680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皇太子 賢을 폐하고 英王 哲을 황태자로 세움, 개원 |
| 683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고종이 낙양 정관전에서 56세로 죽고 황태자가 즉위하도록 유조를 남김 |
| 683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高宗이 貞觀殿에서 붕어(향년 56), 개원 弘道 |
| 684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무측천이 황제 이현을 폐해 여릉왕으로 삼고 따로 가둠 |
| 684년 | 자치통감 | 684년 2월 무오 태후가 백관을 건원전에 모으고 배염 등이 군사를 거느려 입궁해 태후 명을 선포, 중종을 폐해 여릉왕으로 삼아 부축해 전각 아래로 내림 |
| 688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무측천이 낙수에 제사하고 '천수성도'를 받음 |
| 688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明堂을 헐어 萬象神宮으로 고치고 大赦 |
| 688년 | 자치통감 | 688년 9월 한왕 원희·노왕 영기·황공 선·상락공주를 동도에서 붙잡아 위협해 모두 자살하게 하고 성을 虺로 바꾸고 친당을 모두 죽임 |
| 690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무측천이 성신황제 존호를 올리고 황제 예종을 황사로 낮춤(주 건국) |
| 690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國號를 周로 고치고 聖神皇帝로 즉위, 睿宗은 皇嗣로 강등 |
| 705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장간지 등이 우림군으로 궁에 들어 장역지·창종 형제를 죽임(신룡 정변) |
| 705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무측천이 상양궁 선거전에서 83세로 죽음 |
| 705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중종이 국호를 당으로 되돌림 |
| 705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張柬之 등이 羽林兵을 이끌고 거병해 張易之·昌宗 형제를 죽이고(神龍政變) 中宗이 복위, 則天은 上陽宮으로 옮김 |
| 705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국호를 唐으로 되돌림(周 폐지) |
| 705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則天이 붕어(상양궁) |
| 755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안녹산이 동경 낙양을 함락하고 유수 이등·노혁 등을 죽임 |
| 755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安祿山이 東京(洛陽)을 함락, 留守 李憕 전사 |
| 755년 | 자치통감 | 755년 12월 정유 녹산이 동경을 함락, 적이 북을 치며 사방 문으로 들어와 병사를 풀어 죽이고 약탈 |
| 757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광평왕이 동경 낙양에 들어감 |
| 757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東京(洛陽)을 수복, 安慶緒는 河北으로 달아남 |
| 759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사사명이 낙양을 함락하고 이광필이 하양을 지킴 |
| 759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史思明이 東京과 齊·汝·鄭·滑 4주를 함락 |
| 762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옹왕 이적이 횡수에서 사조의군을 크게 깨 6만을 죽이거나 사로잡자 하북 주군이 모두 평정됨 |
| 762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雍王 适(후일 德宗)가 橫水에서 史朝義를 격파하고 河陽·東都를 수복 |
| 762년 | 자치통감 | 762년 회은이 동경과 하양성을 함락하고 중서령 허숙기·왕윤 등을 사로잡았다가 제서로 풀어 줌 |
| 815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이사도가 숭산 승려 원정과 낙양 진주원에 용사를 숨겨 궁을 불태우려 했으나 유수가 포위해 막음 |
| 815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李師道의 부하 訾嘉珍이 東都에서 반란, 留守 呂元膺이 격파 |
| 880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황소군이 동도 낙양을 함락하자 유수 유윤장이 분사 관속을 이끌고 맞이함 |
| 880년 | 자치통감 | 황소가 동도(낙양)를 함락, 유수 유윤장이 백관을 거느려 영접 |
| 885년 | 자치통감 | 진종권이 동도를 함락 |
| 904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주전충이 이극용 등의 흥복 명분을 끊으려 소종을 해침(소종 시해) |
| 904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朱全忠이 唐의 도읍을 洛陽으로 옮김 |
| 904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朱全忠의 부하가 宮門을 범하고 그날 밤 昭宗 시해(38세) |
| 904년 | 신당서(新唐書) 본기 | 昭宣帝(哀帝)가 영구 앞에서 즉위 |
| 904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昭宗이 陝州를 거쳐 西都(長安)에서 와서 洛陽에 이름 |
| 904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朱友恭·氏叔琮·蔣玄暉 등이 시해를 행하여 昭宗이 붕어함 |
| 904년 | 자치통감 | 주전충이 소종의 낙양 천도를 거듭 청함 |
| 904년 | 자치통감 | 주전충이 소종 시해 소식을 듣고 놀란 척 곡하며 땅에 몸을 던짐 |
| 905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추밀사 장현휘가 덕왕 이유 등 9왕을 구곡지에서 취하게 한 뒤 목 졸라 죽임 |
| 909년 | 자치통감 | 후량 태묘 신주를 洛陽으로 옮기고 朱溫이 대량을 떠나 洛陽에 이름 |
| 912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勍이 아병 500으로 友珪와 控鶴士에 섞여 들어가 禁中에 매복, 밤에 문을 베고 침전에 이르러 시종이 모두 흩어짐 |
| 912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太祖의 병이 위중한 때 郢王 友珪가 반역하여 太祖가 붕어함 |
| 912년 | 자치통감 | 朱友珪가 거짓 조서로 博王 友文을 죽이고 즉위 |
| 913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袁象先이 禁兵으로 友珪를 토벌해 友珪가 죽음 |
| 923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莊宗이 洛京(洛陽)으로 감 |
| 923년 | 자치통감 | 莊宗이 대량을 떠나 12월에 洛陽에 이름 |
| 925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壬寅 皇太后가 長壽宮에서 崩, 帝가 궁 안에서 상을 치르고 遺令을 밖에 보임 |
| 925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興聖宮使 魏王 繼岌을 西川四面行營都統으로, 侍中·樞密使 郭崇韜을 西川東北面行營 招討使로 삼음 |
| 925년 | 자치통감 | 洛陽을 다시 東都로, 興唐府를 鄴都로 정함 |
| 925년 | 자치통감 | 孟知祥이 洛陽에 이르러 후한 대접을 받음 |
| 926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帝가 유시에 맞아 亭午에 絳霄殿 행랑 아래서 崩, 향년 43 |
| 926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天成 원년 여름 4월 丙午 帝가 興聖宮에서 西宮으로 가 문무백관이 소복하고 帝는 참최를 입고 빈소를 모심 |
| 926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莊宗이 내란을 당했을 때 달아난 환관 수백 중 중이 되어 太原까지 간 70여 인을 모두 도성에서 주살 |
| 926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莊宗이 郭從謙의 반란으로 43세에 붕어함 |
| 926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李嗣源이 洛陽에 들어와 監國이 되고 靈柩 앞에서 즉위함 |
| 926년 | 자치통감 | 前蜀 王衍과 종족·백관 수천이 洛陽으로 압송됨 |
| 926년 | 자치통감 | 莊宗이 洛陽을 떠나 汜水에 이름 |
| 926년 | 자치통감 | 百官의 세 번 청에 李嗣源이 監國을 수락하고 興聖宮에 듦 |
| 930년 | 자치통감 | 조정이 董璋의 관작을 삭탈하고 토벌군을 일으킴, 石敬瑭을 東川行營都招討使로 삼음 |
| 933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12월 癸卯朔 西宮에서 발상하고 帝가 柩前에서 즉위 |
| 933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秦王 從榮이 병사를 이끌고 興聖宮에 들어갔다 이기지 못하고 처형됨 |
| 933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明宗이 雍和殿에서 67세로 붕어함 |
| 933년 | 자치통감 | 秦王 李從榮이 천진교에 병사를 벌였으나 朱洪實 기병에 패해 피살됨 |
| 933년 | 자치통감 | 後唐 明宗이 죽음 |
| 933년 | 자치통감 | 宋王(閔帝)이 즉위 |
| 934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從珂가 京師에 들어와 監國이 되고 이어 황제로 즉위함 |
| 934년 | 자치통감 | 閔帝가 玄武門으로 빠져나와 도주 |
| 934년 | 자치통감 | 潞王이 閔帝를 폐하고 柩前에서 즉위(末帝) |
| 936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廢帝가 51세로 붕어함(스스로 불에 듦, 윤11월) |
| 936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高祖가 太原에서 와서 입성함(윤11월) |
| 936년 | 자치통감 | 唐 末帝가 가족과 玄武樓에서 분신해 後唐이 멸망, 석경당이 洛陽에 들어감 |
| 939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西京에 큰 물이 나 伊·洛·澗이 모두 넘쳐 天津橋를 무너뜨림 |
| 947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偽命 西京留守 劉晞가 洛城을 버리고 許州로 남주했다가 東京으로 갔고 洛京 巡檢使 方太가 스스로 留守 일을 맡음 |
| 1161년 | 금사(金史) 본기 | 中都를 출발해 河南府에 이르러 사냥하고 汝州 온천에 행차 |
| 1234년 | 송사(宋史) 본기 | 태상시 주부 주양조 등을 낙양에 보내 팔릉을 성묘 |
| 1234년 | 속자치통감 | 3월 신유, 태상시주부 주양조·합문지후 임탁을 낙양에 보내 팔릉을 배알하게 함 |
| 1361년 | 속자치통감 | 6월 찰한테무르가 산동 군도의 내분을 알고 7월 병신에 병든 몸으로 섬에서 낙양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출병 날짜를 논의, 병·택·로 군을 여러 길로 보내고 맹진을 건너 동진 |
| 1368년 | 명사(明史) 본기 | 徐達·常遇春이 洛水 북쪽에서 元軍을 대파하고 河南(洛陽)을 포위, 梁王 阿魯溫이 항복 |
| 1368년 | 속자치통감 | 3월 무신, 명 서달·상우춘 등이 호뢰관에서 낙양에 들어가자 탁음첩목이가 5만으로 낙수 북쪽에 진을 쳤으나 상우춘이 단기로 돌격해 크게 격파 |
| 1641년 | 명사(明史) 본기 | 李自成이 河南(洛陽)을 함락, 福王 朱常洵이 살해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