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조선」: 정사 사료. 다루는 해 1392년 ~ 1882년, 사건 148건을 해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원문 라이선스와 출처 포함.
| 등급 | 정사 |
|---|---|
| 시점 | 외부 시점 |
| 다루는 해 | 1392년 ~ 1882년 |
| 사건 수 | 사건 148건 · 지도에 놓은 113건 |
| 저자 | William Elliot Griffis (1882, 미국인 선교사·교육자) |
| 원제 | Corea, the Hermit Nation |
지역 분포: 한반도 99 · 중국 40 · 일본 9
| 해 | 장소 | 사건 | 원문 위치 |
|---|---|---|---|
| 1392년 | Kaesong | 이성계 측이 송도(Sunto)에서 왕을 폐위하고 강화도(Kang-wa)로 내보내며, 선왕들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우고 제사를 금함 | p.77 (ch.XI New Cho-sen) |
| 1392년 | Seoul | 새 왕조가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한강변에 석축 성벽을 둘러 쌓음 | p.79 (ch.XI New Cho-sen) |
| 1392년 | 현 왕조 개국(1392) 이후 창업자의 계승자가 29명 있었고, 그중 조카·사촌·아우도 있었다. | p.223 | |
| 1400년 ~ 1418년 | Seoul | 태종이 왕에게 직접 상소하는 함, 신문고(Sin-mun-to)를 설치 | p.83 (ch.XI New Cho-sen) |
| 1400년 ~ 1418년 | 태종이 명 황제와 함께 일본 천황에게 항의하여 해적 단속을 요구 | p.83 (ch.XI New Cho-sen) | |
| 1450년 | 1450년 문종 즉위와 명 사신 책봉. 명 사신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국경은 동쪽 산(Eastern Mountain Border) 부근이었고 그 서쪽에 무인지대가 있었음 | p.84 (ch.XI New Cho-sen) | |
| 1460년 | Kamakura | 조선이 쇼군 조정(가마쿠라)에 보낸 마지막 사절. 이후 양국 공식 교류가 끊기고 쓰시마 상인이 중간을 맡음 | p.86-87 (ch.XI New Cho-sen) |
| 1469년 ~ 1494년 | 두 유력 귀족이 한 관직을 두고 다퉈 가문·추종자까지 얽혔고, 왕은 중립을 지켰다. 이후 당이 동인·서인으로 조직되고 이어 남인·북인(대북·소북)으로 나뉘었다. | p.224 | |
| 1585년 ~ 1586년 | Seoul | 히데요시가 보낸 사절 야스히로가 서울에서 조선 회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자, 히데요시가 그와 그 일가를 죽이라고 명함 | p.89-91 (ch.XII Events Leading to the Japanese Invasion) |
| 1586년 ~ 1590년 | Seoul | 요시토시 사절 일행이 서울에 와서, 조선이 요구한 해적 길잡이 역적 14명을 넘기고 조선 관리들이 참수함 | p.91 (ch.XII) |
| 1590년 | Kyoto | 조선 사절단이 요시토시 일행과 함께 서울을 떠나 교토로 감. 1590년 여름 교토 도착 | p.92 (ch.XII) |
| 1591년 | Kyoto | 교토에서 히데요시 알현을 허락받음. 히데요시의 답서는 오만해 사절이 여러 번 돌려보냄 | p.92-93 (ch.XII) |
| 1591년 | Fusan (Busan) | 요시토시가 자비로 부산에 와서 서울에 청원했으나 열흘 기다려도 답이 없고, 도전적인 답서만 받음 | p.94 (ch.XII) |
| 1591년 | Peking (Beijing) | 조선 조정이 일본의 침략 계획을 명나라에 알리려고 사신을 베이징에 보냄. 류큐 사신이 먼저 도착 | p.94 (ch.XII) |
| 1592년 | Karatsu (Nagoya, Hizen) | 일본 육해군이 히젠 나고야(지금의 가라쓰)에 모임. 원문 병력: 전쟁 동원 50만 중 침공군 15만, 예비 6만, 히데요시 호위 10만 | p.96 (ch.XIII The Invasion-On to Seoul) |
| 1592년 | Fusan (Busan) | 5월 25일 일본 함대(고니시 부대)가 부산에 상륙해 부산을 점령하고 동래성을 포위하자 성이 곧 항복 | p.100-101 (ch.XIII) |
| 1592년 | Sangju | 고니시 부대가 동래성을 떠나 낙동강을 따라 상주로 북상. 부산 수령은 서울에 가서 편지를 전하지 않았다고 거짓 보고 | p.101 (ch.XIII) |
| 1592년 | Seoul | 일본군이 부산 상륙 18일 만에 서울(한양)에 입성 | p.101 (ch.XIII) |
| 1592년 | Chungju | 고니시 군이 충주 성을 며칠 포위해 함락. 프로이스 보고 인용, 조선 측 손실 5,000명 중 3,000명이 충주에서 전사. | p.102-103 |
| 1592년 | Seoul | 가토와 고니시 두 부대가 같은 날 서울에 들어감. 왕·궁정·군대는 사흘 전 도성을 떠나 저항 없음. | p.103 |
| 1592년 | Seoul | 조선 왕이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 시작(6월 9일). 식량 준비 없이 출발해 일행이 굶주림. | p.105 |
| 1592년 | 임진강 건너편의 조선 군선에 맞서 일본군이 가짜 후퇴로 조선군을 유인해 격파, 노획한 배와 뗏목으로 전군 도하. | p.106 | |
| 1592년 | Pyongyang | 고니시 군이 평양(평안) 성을 점령. 수비군은 무기를 해자에 던지고 도주, 곡식·건어물 창고는 일본군 손에 들어감. | p.106-107 |
| 1592년 | Pyongyang | 명군 약 5,000명이 평양 성을 공격. 일본군이 성 안으로 끌어들인 뒤 측면 진지에서 화살·장창으로 격퇴, 명군 지휘관 전사. | p.109 |
| 1592년 | Sunan | 진익기 중개로 고니시와 명 측 강화 협상. 고니시 요구: 신라·백제 옛 영토를 일본 속령으로 넘김, 사실상 대동강 이남 전체. | p.110 |
| 1592년 | 가토가 함경도 원정 중 두 왕자와 고관 다수를 포로로 잡음. | p.111 | |
| 1593년 | Sunan | 고니시 측이 명 측 사절 진익기를 만나러 보낸 호위 20명이 명군의 연회 뒤 기습당해 대부분 살해(두세 명만 생존). | p.111-112 |
| 1593년 | Pyongyang | 명·조선 연합군이 평양 성 전 방면 총공격. 둘째 날 저녁 일본군 외곽 진지 상실, 일본군 약 2,000명 전사. | p.112 |
| 1593년 | Pyongyang | 고니시 군이 한밤중 평양 성을 비우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 퇴각. 연합군은 빈 성에 들어갔고 명군 지휘관이 추격을 금지. | p.113 |
| 1593년 | Seoul | 서울 대부분을 방화. 집·성문·다리·관청이 소실되고, 주민을 창끝으로 몰아냄. 쓸모 있는 장정만 남김. | p.116 |
| 1593년 | 고니시 측 일본군 3개 부대(본진 1만, 나머지 각 3,000)가 명·조선 연합군과 서울 근교에서 교전. 일본 측 기록으로 연합군 1만 명 전사. | p.116-117 | |
| 1593년 | 고니시와 진익기가 강화 조건 합의. 일본이 삼남 3도를 보유하고, 조선이 조공을 재개하며, 히데요시를 조선 왕으로 인정하는 항목 포함. 명 측 승인 없음. | p.118-119 | |
| 1593년 | Seoul |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고 같은 날 명군 선발대가 입성. 일본군은 부산·동래 등 해안으로 퇴각. | p.120-121 |
| 1593년 | Chinju | 가토 군이 진주성(Chin-chiu)을 포위해 함락. 거북 수레로 성벽 아래를 파고 돌입, 뒤이어 성 안 학살. | p.125-126 |
| 1597년 | Busan | 2차 침공 부대(구로다·나가마사 등)가 부산으로 출항해 고니시·가토 군과 합류. | p.128 |
| 1597년 | 일본 수군이 조선 함대와 두 시간 교전. 조선 선박 174척이 소각되거나 나포됨(원문 수치). | p.130 | |
| 1597년 | Namwon | 2차 침공 중 남원성 포위. 9월 21일 선발대가 성 앞 1마일에 진을 치고 본진이 성을 둘러싸 참호 구축. 성 안에 명군 1만 명 주둔. | p.131 |
| 1597년 | Gyeongju | 일본군이 신라 옛 수도 경주를 불태움. 옛 사찰부터 시작해 주택 30만 호 소각(원문 기록). | p.136 |
| 1598년 | Ulsan | 명군이 울산성 총공격. 1월 31일 시작, 4시간 동안 공격 일곱 차례 격퇴됨. 원군(가토) 도착 전 포위 상태. | p.141 |
| 1598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유언으로 조선 주둔군 전원 철수 명령, 군대 귀국 시작. | p.146 | |
| 1619년 | 명이 조선군 2만을 보내 후금(만주족)과 싸움. 명군 패배 뒤 조선군이 후금 쪽으로 투항. | p.157 | |
| 1627년 | Uiju | 후금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침입. 의주가 첫 점령되고 평안 대로를 따라 서울 방향으로 진격. | p.157-158 |
| 1627년 | Seoul | 후금군이 서울을 포위하고 공성 시작. 왕은 피를 피하려 조공을 보내고 화약을 맺음. | p.158 |
| 1627년 | 네덜란드 배 Hollandia 선원들이 조선 해안에 표류 — 유럽인이 조선에 처음 들어온 기록 | part_04 줄 430 (원문 줄 9007) | |
| 1635년 | 청 군이 조선을 침입 — 사건 당시 네덜란드 선원 두 명이 전쟁 중 죽음 | part_04 줄 503 (원문 줄 9080) | |
| 1637년 | Ganghwa Island | 청 군이 대포와 배를 갖추고 강화(Kang-wa)를 함락 — 왕실과 귀족 부인들이 피신해 있던 곳 | part_04 줄 19 (원문 줄 8596) |
| 1637년 | Seoul | 인조가 명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두 왕자를 인질로 주고,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내기로 한 조약 | part_04 줄 23 (원문 줄 8600) |
| 1644년 | Beijing | 청 조정이 조선이 해마다 바칠 조공 목록(금·은·쌀·비단·종이·가죽 등)을 정함 | part_04 줄 58 (원문 줄 8635) |
| 1647년 | Seoul | 표류한 일본인 일행이 청 황제의 호송으로 한양에 도착, 왕궁에서 대접받음 | part_04 줄 251 (원문 줄 8828) |
| 1647년 | Busan | 표류 일본인 일행이 한양을 떠나 부산 도착 — 일본 조계(왜관) 근처 감시 체제를 기록 | part_04 줄 284 (원문 줄 8861) |
| 1650년 | Beijing | 청 궁중에 들어간 조선 포로 출신 여인의 영향으로 사신(그녀의 아버지)이 공물을 크게 줄임 | part_04 줄 120 (원문 줄 8697) |
| 1653년 | Jeju City | 네덜란드 배 Sparwehr가 제주(Quelpart) 해안 폭풍에 좌초 — 36명 생존, 관원에게 붙잡힘 | part_04 줄 517 (원문 줄 9094) |
| 1653년 ~ 1654년 | Haenam | 생존 네덜란드인 일행이 육지 첫 도시 해남(Heynam)에 도착 — 한양까지 도보 호송 시작 | part_04 줄 586 (원문 줄 9163) |
| 1653년 ~ 1654년 | Jeonju | 일행이 전라도 감영 소재지 전주(Khin-tyo=Chon-chiu, 본문 Chon-chiu)에 도착 | part_04 줄 605 (원문 줄 9182) |
| 1653년 ~ 1654년 | Gongju | 일행이 충청도 수부 공주(Konsio)를 지나 경기 경계로 감 | part_04 줄 609 (원문 줄 9186) |
| 1653년 ~ 1654년 | Seoul | 네덜란드 일행이 한양에 입성 — 궁중에서 재주를 보이고 궁중 호위대에 배속됨 | part_04 줄 612 (원문 줄 9189) |
| 1657년 | Seoul | 네덜란드 일행이 한양을 떠나 말을 타고 남쪽 성곽 도시(Diu-siong, 위치 불명)로 이동 | part_04 줄 705 (원문 줄 9282) |
| 1658년 | Seoul | 왕 교체 — 앞 왕 퇴위 뒤 새 왕(Yen-chong) 즉위, 네덜란드인 처지도 바뀜 | part_04 줄 722 (원문 줄 9299) |
| 1663년 | 한양 명령으로 네덜란드 생존자들이 세 고을(Saysiano·Siun-schien·Namman)로 나뉘어 22명이 됨 | part_04 줄 773 (원문 줄 9350) | |
| 1665년 | 네덜란드 생존자들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 — 본문 기록은 짧음 | part_04 줄 814 (원문 줄 9391) | |
| 1666년 | 네덜란드인을 돌봐 주던 착한 고을 원님이 죽음 — 탈출 준비 시작 | part_04 줄 815 (원문 줄 9392) | |
| 1667년 | 네덜란드 생존자 탈출 — 배를 사서 바다로 나가 일본 고토 제도에서 일본인에게 넘겨짐 | part_04 줄 823 (원문 줄 9400) | |
| 1676년 ~ 1720년 | 서인 귀족 윤씨 아버지의 묘갈문을 두고 제자와 스승이 다투었고, 이 논쟁으로 서인이 소론(제자 쪽)과 노론(스승 쪽)으로 갈렸다. | p.224–225 | |
| 1707년 | Seoul | 청 강희제 측량 사절이 조선 왕궁에서 지도 원본을 받아 감 — 유럽 지도의 조선 지명 바탕 | part_04 줄 325 (원문 줄 8902) |
| 1709년 | Kyongwon | 프랑스 예수회 측량단이 두만강 건너편에서 조선 쪽 성곽 도시 네 곳의 위치를 측정 | part_04 줄 343 (원문 줄 8920) |
| 1720년 | 숙종이 아들 없이 있을 때 네 당이 둘(반대당·왕당)로 합쳐졌다. 반대당은 숙종의 동생을 세우려고 연경에 밀사를 보냈고, 왕당은 자객을 보내 밀사를 국경을 넘기 전에 죽였다. | p.225 | |
| 1724년 | 반대당이 세운 영조가 형 사후 즉위했고, 1776년까지 재위했다. | p.226 | |
| 1724년 ~ 1776년 | 영조가 장남 사망 뒤 둘째 아들 사도를 후계로 세워 정사에 참여시켰다. 사도가 화해와 사면을 펴려 하자 영조가 그를 나무 궤에 살아 있는 채 들어가 자게 하고 뚜껑을 봉인해 질식시켰다. 그 이름을 왕 목록에 올릴지는 당파 간 논쟁으로 남았다. | p.226 | |
| 1784년 | 서울(한양) | 1784년 4월 왕의 스승이 천주교를 겨냥한 첫 공식 문서를 냄 — 부모·친척에게 교인과 관계를 끊으라 함. 첫 희생자 토마스 김은 재판·고문 뒤 유배지에서 죽음. | p.349–350 · part_07 L1197–1199 |
| 1785년 | 1785년 왕이 형법을 개정해 공포했고, 이전 것보다 크게 완화했다. 본문 시점의 현행 형법의 기초가 되었다. | p.235 | |
| 1790년 | 서울(한양) | 1790년 9월 17일 한양을 떠난 연행 사절단 편에 교인 바오로가 실려 감 — 북경 주교에게 신앙·의식 질문을 담은 편지를 가져감. | p.351 · part_07 L1274–1277 |
| 1791년 | 처형지 미상 | 1791년 12월 8일 신주(조상 위패)를 불태운 교인 바오로와 야고보 김을 참수 — 본문은 이를 첫 피 흘림으로 적음. | p.352 · part_07 L1306–1322 |
| 1794년 | 서울(한양) | 1794년 6월 18일 신부 주문모를 한양에 데려온 교인 셋이 고문 끝에 옥중 사형, 시신은 한강에 버려짐. | p.354 · part_07 L1398–1416 |
| 1794년 | 서울(한양) | 1794년 12월 23일 중국인 신부 야고보 쭈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도착, 바로 사목 시작. | p.354 · part_07 L1396–1397 |
| 1801년 | 서울(한양) | 1801년 순조 즉위 뒤 섭정 대왕대비가 노론 계열 신료를 세우고 전국 박해 교지를 냄 — 신분·나이·성별 무관하게 교인 체포. | p.356 · part_07 L1484–1494 |
| 1801년 | 서울(한양) | 1801년 5월 31일 Alexander Wang 참수 — 그가 비단에 쓴 북경 주교 앞 편지(유럽 6~7만 병력으로 조선 정복 요청)가 발각되어 조정이 음모로 판단. | p.357–358 · part_07 L1531, L1547–1552 |
| 1802년 | 서울(한양) | 1802년 1월 25일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는 새 교지 — 본문은 이것이 나라 안 모든 곳에 교리를 알린 꼴이 됐다고 적음. | p.358 · part_07 L1592–1595 |
| 1815년 | 강원·경상 일대(도 단위) | 1815년 강원·경상 일대에서 정치와 무관한 천주교 박해가 잠깐 일어남. | p.358 · part_07 L1620–1622 |
| 1817년 | 서해안(지점 미상) | 1817년 영국 군함 Alceste·Lyra가 서해안에 나타남 — 조정은 교인과 내통을 의심했으나 측량·소고기 구입·관리 면담만 하고 떠남. | p.358–359 · part_07 L1624–1642 |
| 1826년 | 전라도(Chulla, 도 단위) | 1826년 전라도에서 다툼 끝에 밀고가 나와 석 달 동안 심한 박해. | p.359 · part_07 L1644–1652 |
| 1832년 | 전라도 해안(지점 미상) | 1832년 7월 17일 구츨라프 목사가 전라 해안에 닿아 한 달 머무름 — 책·선물을 보냈으나 왕은 거절. | p.359–360 · part_07 L1654–1670 |
| 1837년 | 서울(한양) | 1837년 1월 17일 프랑스 신부 샤스탕이 상복 위장으로 Ai-chiu 세관을 지나 한양에서 모방과 합류. | p.361–362 · part_07 L1782–1784 |
| 1838년 | 서울(한양) | 1838년 12월 19일 주교 임베르 입국 — 왕궁 가까이에 거처를 잡음. | p.362 · part_07 L1785–1787 |
| 1839년 | 서울(한양) | 1839년 1월 16일 박해 찬성파가 주도권을 잡고 8도 전역에 다섯 집 단위 수색 명령 — 기해박해의 시작. | p.362 · part_07 L1789–1796 |
| 1839년 | 서울(한양) | 1839년 9월 21일 프랑스 신부 셋(임베르·모방·샤스탕)을 한강변에서 참수 — 임베르는 8월 10일 자수. 시신 수습하던 교인도 붙잡힘. | p.362–363 · part_07 L1807–1811 |
| 1845년 | 서울(한양) | 1845년 1월 8일 김대건이 국경을 넘어 한양에 도착 — 동료 셋이 국경 밖 외진 곳에서 맞아 들임. | p.364 · part_07 L1946–1952 |
| 1845년 | 제주(Quelpart) | 1845년 6월 25일~7월 말 영국 Samarang호 벨처 함장이 제주와 남해안 측량 — 이후 해안 감시가 한층 강화됨. | p.366 · part_07 L1977–1983 |
| 1845년 | 전라 해안(지점 미상) | 1845년 10월 12일 프랑스 신부들과 김대건이 상복 차림으로 전라 해안 외진 곳에 밤에 상륙. | p.367 · part_07 L1992–1996 |
| 1848년 | 서울(한양) | 1848년 말 토마스 최가 Ai-chiu 국경을 무사히 넘어 며칠 뒤 한양 도착 — 이후 종교서 인쇄·교인 1850년 1만 1천 명 기록. | p.369 · part_07 L2127–2148 |
| 1857년 | 서울(한양) | 1857년 3월 31일 페론 신부가 조선 밀수선을 타고 들어와 한양에서 주교 베르뇌와 재회 — 같은 해 교인 1만 6,500명 기록. | p.370 · part_07 L2186–2199 |
| 1860년 | Kyongwon | 두만강 경계 장시(조선 상인·청 상인 교역)가 1860년까지 열림, 하루 반나절 교역 뒤 국경 밖으로 쫓김 | part_04 줄 378 (원문 줄 8955) |
| 1861년 | 메린 섬 경유(황해 쪽, 지점 미상) | 1861년 10월 프랑스 신부 4명(랑드르·조아노·리델·칼레)이 메린 섬 경유로 들어옴. | p.372 · part_07 L2301–2306 |
| 1863년 ~ 1874년 | 국왕의 아버지인 태원군(Tai-wen-kun)이 1863~1874 거의 절대 권력으로 섭정했고, 국왕이 성년이 되어 끝났다. | p.230 | |
| 1864년 | 서울(한양) | 1864년 1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음 — 조대비가 옥새를 쥐고 대원군 아들 12세를 왕으로 세움, 대원군 9년 집권 시작. | p.373 · part_07 L2336–2356 |
| 1866년 | Seoul | 1866년 청나라 사신이 왕궁 안 「남쪽을 위한 궁」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룻밤 묵었다. | p.220 |
| 1866년 | Kanghwa (Kang-wa) | 1866년 왕궁 도서관의 일부를 강화로 옮겼을 때 프랑스군이 그중 일부를 노획했다. | p.220 |
| 1866년 | 원산 일대(Broughton's Bay) | 1866년 1월 러시아 군함이 Broughton's Bay에 다시 와 통상을 요구, 함경 국경 병력 통과 예고. 조정은 청의 속국이라 답. | p.374 · part_07 L2375–2390 |
| 1866년 | 서울(한양) | 1866년 3월 병인박해: 3월 8일 베르뇌 주교 등 4명 한강변 참수, 3월 11일 프랑스 신부 2명과 신학생 12명, 3월 30일 다블뤼 참수. | p.375–376 · part_07 L2447–2462 |
| 1866년 | Seoul | 프랑스 군함 두 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 앞에 정박, 여러 날 수심과 높이를 재고 측량함 | p.380 |
| 1866년 | Kang-wa (Kanghwa city) | 프랑스 군이 강화 방면으로 무력 정찰, 작은 포대(대포 2문)를 점령 | p.381 |
| 1866년 | Kang-wa (Kanghwa city) | 프랑스 군이 강화 성 정문을 공격해 성을 점령, 대포 약 80문과 화승총 6,000여 정, 은괴를 노획 | p.382 |
| 1866년 | Tong-chin (Tongjin) | 프랑스 상륙대가 강화 맞은편 본토의 요새 문을 공격해 점령, 프랑스 2명 사망 25명 부상, 뒤에 함선으로 철수 | p.382-383 |
| 1866년 | Kanghwa Island (fortified monastery) | 프랑스군 160명이 강화 섬 수도원 요새를 공격했다가 성벽의 일제 사격에 무너져 퇴각, 부상 32명 | p.384-385 |
| 1866년 | Kang-wa (Kanghwa city) | 철수하는 프랑스군이 강화 읍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듦. 본문 서두는 이 일로 주민 1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적음 | p.385-386 |
| 1866년 | Seoul | 조정이 천주교 근절을 결정, 신자를 한강변에서 참수하고 여성과 아이까지 처형 명령 | p.386 |
| 1866년 | Pyongyang (Ping-an city, Taedong river) |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부근에 이르렀다가 불타 승무원 전원이 죽음. 본문은 불태움과 참수 두 설을 적음 | p.392 |
| 1867년 | 미국 증기선 Wachusett가 황해 연안에 정박해 살인자 인도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냄, 1월 29일 현지 관리는 떠나라고만 답함 | p.393-394 | |
| 1867년 | Pyongyang (Ping Yang inlet) | 미국 함 Shenandoah가 대동강 입구를 측량하며 평양 쪽에서 셔먼호 사건 경위를 들음 | p.395 |
| 1867년 ~ 1868년 | 독일계 상인 오페르트 일행이 상륙해 무덤을 파헤치려 했으나 돌 덮개를 열지 못하고 철수 | p.398-399 | |
| 1867년 ~ 1868년 | Kanghwa Island | 오페르트 일행이 강화 섬 쪽에서 상륙하던 중 조선 측 사격을 받아 2명 사망, 1명 부상 | p.400 |
| 1871년 | Kanghwa Island, lower end (Du Conde fort) | 미국 측량 함대가 강화 섬 하류 굽이에 들어가자 조선 측 요새가 일제 사격, 미국 측 부상 1명 | p.410-411 |
| 1871년 | Kanghwa Island, first fort | 미국 상륙부대가 강화 섬의 첫 요새를 점령, 밤에는 조선군이 야습했으나 격퇴 | p.413 |
| 1871년 | Kanghwa Island, citadel | 미국 보병·해병이 강화 섬 본성 언덕을 돌격해 점령, 조선 측 시신 243구·포로 20명, 미군 2명 사망(중상 맥키 포함) | p.415-417 |
| 1873년 | Seoul | 고종이 성년에 이르러 대원군을 실각시킴. 본문은 왕비가 뒷받침했다고 적음 | p.421 |
| 1875년 | Kang-wa (Kanghwa city) | 강화 근처에서 물을 긷던 일본 군함 운요호 수병이 조선 군에 피격되자 일본군 36명이 요새를 공격해 점령, 23일 나가사키로 철수 | p.422 |
| 1876년 |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조선 조약 체결. 원문은 이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것으로 서술 | p.53 (ch.VIII Japan and Corea) | |
| 1876년 | Kang-wa Island (treaty house) | 일본 구로다 사절단이 강화도 조약 회담장에 상륙해 조선 고관 두 명과 협상 | p.423 |
| 1876년 | Kang-wa Island (treaty house) | 강화도 조약 서명. 조선이 독립국으로 인정됨 | p.423 |
| 1880년 | Wonsan (Gensan) | 원산 개항. 일본 조계 약 42에이커 | p.426 |
| 1880년 | Busan (Fusan) | 미국 군함 Ticonderoga가 부산에 들어가 서한 전달을 시도했으나 관리들이 받지 않음 | p.428-429 |
| 1880년 | Incheon (Nin-chiun) |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 인천에 가서 일본 조계 땅을 고름 | p.429 |
| 1881년 | Seoul | 척사 유생 이만손(본문 Ni Mansun)이 칠 일간 궁궐 앞에서 상소 농성, 인천 개항과 개화 정책 중단을 요구 | p.431-432 |
| 1882년 | Seoul | 1882년 7월 서울 소요 때 섭정 칭호(일본어 표기 Tai-in kun)가 서양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다. | p.230 |
| 1882년 | 1882 초, 배외를 과격하게 주장한 Kozaikai 가 왕을 비난한 죄로 처형됨. 왕 암살 모의 40명이 발각되어 칼과 고문이 쓰였고 주모자는 사지 찢기형을 받음(6명 사면). 이후 개화파가 우세해짐. | XL장 p.434 | |
| 1882년 | Tianjin | 개화파 Gio Inchiu·Riosen 이 톈진으로 떠남. 미국·청에 조선 정부가 조약을 맺을 준비가 됐다고 알리는 임무. | XL장 p.434 |
| 1882년 | Seoul | 일본 장교(Horimoto 중위 지휘)가 서울에서 뽑은 병사를 훈련함. 군제 개편의 시작. | XL장 p.435 |
| 1882년 | Tokyo | 조선이 도쿄에 스나이더 소총 수백 자루와 일본 병기창의 무라타 소총 2만 자루를 주문. | XL장 p.435 |
| 1882년 | Kyoto | 조선 고관 두 명이 4월 일본 방문. 나가사키에서 차관 소문에 시달렸으나 교토와 도쿄로 감. | XL장 p.435 |
| 1882년 | Incheon | 미국 제독 슈펠트가 스워타호로 5월 7일 인천 앞에 도착, 이틀 뒤 해안 가설 막사에서 미국과의 조약 서명. (원문에 일본 사절 Iwaki Kuan 호 기항이 도착 한 시간 전이라고 함 — 이 줄에 합침) | XL장 p.435 |
| 1882년 | Seoul | 미·청 조약 서명 나흘 뒤 서울에서 9살 세자의 혼례(준 대감의 딸). 행렬이 거리를 지남. | XL장 p.436 |
| 1882년 | Incheon | 영국 제독 Willes 가 나가사키에서 5월 27일 출발, 인천에서 조약 체결 후 6월 14일 요코하마 귀환. | XL장 p.436 |
| 1882년 | Incheon | 프랑스 해군 함선이 6월 5일 인천 항구에 들어옴. | XL장 p.436 |
| 1882년 | Wonsan | 청이 조약 뒤 상하이에서 관리를 보내 원산과 부산에서 배 타고 공관 부지를 고르게 함. | XL장 p.436 |
| 1882년 | 1882 여름 가뭄. 비가 안 오고 우물이 마르며 벼농사가 망할 판. 점쟁이·배외파가 이를 이용해 민심을 자극, 병사들도 불만(급료 체불·식량 삭감). | XL장 p.437 | |
| 1882년 | Seoul | 7월 23일 왕이 기우제 중 밖에 있을 때 대원군 측 폭도가 왕을 잡으려 함. 왕은 궁성으로 피함. | XL장 p.438 |
| 1882년 | Seoul | 7월 23일 폭동으로 민비, 세자와 세자빈, 대신들과 일본인 7명이 살해됨. 하루 만에 피가 낭자. | XL장 p.438 |
| 1882년 | Seoul | 7월 23일 저녁 5시 50분 폭도가 일본 공사관을 덮침. 총·화살·돌을 쏘고 불을 질러, 일본인들이 남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칼과 권총으로 포위를 뚫음. | XL장 p.439 |
| 1882년 | Incheon | 하나부사 일행이 한강을 건너 인천으로. 다음날 오후 3시에 도착. 인천 부사가 음식과 옷을 줌. | XL장 p.439 |
| 1882년 | Incheon | 인천에서 자던 일본인 일행을 폭도가 기습. 주둔 병사가 폭도에 가담해 울타리 뒤에서 쏨. 일본인 3명 전사, 2명 실종. | XL장 p.440 |
| 1882년 | Nagasaki | 일본인 26명이 인천 앞바다를 거쳐 영국 측량선 Flying Fish 에 올라 7월 26일 나가사키로 향함. | XL장 p.440 |
| 1882년 | Tokyo | 하나부사가 8월 8일 도쿄에서 일본 천황을 알현. | XL장 p.441 |
| 1882년 | Shimonoseki | 일본 정부가 지체 없이 육군을 시모노세키와 쓰시마에 모음. 해군 협력. | XL장 p.441 |
| 1882년 | Seoul | 하나부사가 일본 군 호위를 받고 8월 16일 서울에 다시 들어감. 조선 측은 예의로 맞음. | XL장 p.441 |
| 1882년 | Seoul | 8월 20일 하나부사가 왕을 알현, 일본 정부의 요구를 전달. | XL장 p.441 |
| 1882년 | Seoul | 요구에 대한 확답이 없자 하나부사가 8월 25일 서울을 떠나 배로 돌아감. 무력 위협. | XL장 p.441 |
| 1882년 | Seoul | 대원군의 사과를 받고 하나부사가 8월 30일 서울로 돌아옴. 일본 요구를 전부 수락. | XL장 p.441 |
| 1882년 | Tianjin | 청 사신이 청군 3~4천 명을 서울로 불러 대원군을 강제로 잡아 청 배에 태워 톈진으로 보냄. | XL장 p.441 |
| 1882년 | Seoul | 뉴욕 트리뷴 10월 2일 전보(9월 13일까지 소식): 조선 정부가 반란자 20일 내 체포·처벌, 손해배상·사과사절 등 일본 요구 조건 서약. | XL장 p.4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