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남유럽(이탈리아·그리스·이베리아·발칸) · 좌표: 41.890, 12.491 · 사건 477건
| 해 | 사료 | 내용 |
|---|---|---|
| 기원전 753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로물루스가 쟁기로 도시 경계의 고랑을 깊이 파 도시를 세움 전승 |
| 기원전 750년 | 리비우스 로마사 | 로물루스가 적장에게서 빼앗은 무구를 목동들이 신성시하는 참나무에 걸고 유피테르 신전 터를 표시함 전승 |
| 기원전 750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건국 넷째 달에 사비니 여인 약탈이 벌어짐 전승 |
| 기원전 749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사비니가 타티우스를 장군으로 세워 로마로 진군 전승 |
| 기원전 715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누마가 로마에 이중문 전쟁의 문(야누스 신전)을 세움 전승 |
| 기원전 509년 | 리비우스 로마사 | 켄투리아 민회에서 집정관 두 명이 선출됨; 타르퀴니우스는 성문이 닫혀 입성 못 하고 추방 결의, 왕의 아들들은 진영에서 쫓겨남 전승 |
| 기원전 509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루크레티아 사건을 계기로 민중이 반란을 일으킴 전승 |
| 기원전 50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포르세나가 로마를 에워싸자 기근이 닥치고 다른 투스키군도 침입 전승 |
| 기원전 50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포르세나가 점령지 반환·포로 송환·탈주자 수용 조건으로 전쟁을 끝냄 전승 |
| 기원전 451년 | 리비우스 로마사 | 아테네에 다녀온 위원 세 명이 먼 사절에 대한 보상으로 자리에 앉음 — 그리스 법에 익숙한 이들이라는 이유 전승 |
| 기원전 39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밀루스가 분노해 도시를 떠나 망명하기로 결심 |
| 기원전 390년 | 리비우스 로마사 | 갈리아군이 시내에서 도시를 파괴하려는데 모두가 그 열의에 찬 것은 아니었음 전승 |
| 기원전 390년 | 리비우스 로마사 | 갈리아군은 열려 있는 시가는 점령했으나 소수 방어군이 성채와 카피톨리움에서 격퇴함 전승 |
| 기원전 390년 | 리비우스 로마사 | 포위와 전쟁 최대의 해악은 양 진영을 덮친 기근이었고 갈리아군에는 역병도 번짐 전승 |
| 기원전 390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전투 사흘째에 브렌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도착 |
| 기원전 390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갈리아인이 카피톨 앞에 한가히 앉아 포위가 일곱째 달에 접어듦 |
| 기원전 390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야만인이 일곱 달 동안 점령했던 로마가 해방됨 |
| 기원전 389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이 승리로 카밀루스가 개선식을 받아 인기를 더함 |
| 기원전 365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밀루스가 천수를 다하고 사망 |
| 기원전 359년 | 리비우스 로마사 | 티부르군이 한밤 고요한 시각에 로마시를 향해 진군함 |
| 기원전 356년 | 리비우스 로마사 | 마르키우스 루틸루스가 평민 출신 첫 독재관으로 지명됨 |
| 기원전 295년 | 리비우스 로마사 | 파비우스가 데키우스 군에게 에트루리아를 맡기고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갈리아·에트루리아·삼니움에 대한 개선식을 치름 |
| 기원전 222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원로원이 마르켈루스 단독의 개선식을 결의, 행렬이 화려했음 |
| 기원전 217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파비우스가 독재관에 임명됨 |
| 기원전 217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민중이 미누키우스에게 독재관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 |
| 기원전 216년 | 리비우스 로마사 | 보고로는 집정관 둘과 집정관군 둘이 모두 사라져 로마는 충격에 빠짐 |
| 기원전 211년 | 리비우스 로마사 |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카페나 문을 지나 시내를 가로질러 콜리나 문 밖에 진영을 침 |
| 기원전 21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적들의 반대로 마르켈루스가 개선식 대신 소규모 의식을 받아들임 |
| 기원전 211년 | 폴리비오스 역사 | 한니발의 접근 소식에 로마가 공황 |
| 기원전 211년 | 폴리비오스 역사 | 한니발이 로마 10스타디온 앞까지 와서 되돌아감 |
| 기원전 207년 | 리비우스 로마사 | 한 집정관은 전차를 타도 진짜 개선은 말을 탄 다른 집정관(네로)의 것이라는 평 |
| 기원전 201년 | 리비우스 로마사 | 시팍스가 개선식 직전 티부르에서 죽었으나 스키피오 개선의 영광은 줄지 않음 |
| 기원전 200년 | 리비우스 로마사 | 카르타고와 강화한 지 몇 달 안에 필리포스 왕과의 전쟁이 시작됨 |
| 기원전 19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민중이 서른이 안 된 플라미니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 |
| 기원전 196년 | 폴리비오스 역사 | 로마에서 필리포스와의 조약이 확정됨 |
| 기원전 19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토가 개선식을 치름 |
| 기원전 19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개선 행렬에 그리스 투구·마케도니아 방패 등 전리품이 전시됨 |
| 기원전 187년 | 리비우스 로마사 | 스키피오가 자마에서 이긴 기념일에 호민관과 시민 앞에서 연설함 |
| 기원전 186년 | 리비우스 로마사 | 바쿠스 제의 사건에서 캄파니아인 미니우스 케리니우스를 쇠사슬로 아르데아에 보내 감시하게 함 |
| 기원전 18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집정관 10년 뒤 카토가 감찰관직에 출마 |
| 기원전 172년 | 리비우스 로마사 | 원로원이 페르세우스를 공적(公敵)으로 선언하기로 결정함 |
| 기원전 16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집정관 후보로 나서 선출됨 |
| 기원전 167년 | 리비우스 로마사 | 아니키우스의 일리리아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더 즐겁게 행진하고 장군을 찬양하는 노래가 많았음 |
| 기원전 167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아이밀리우스의 개선 행진이 사흘로 배정됨 |
| 기원전 128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히르카노스가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우호 조약을 새롭게 함 |
| 기원전 123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민중이 법을 채택하고 기사 계급에서 배심원을 뽑는 권한을 카이우스에게 맡김 |
| 기원전 12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원로원이 집정관 오피미우스에게 도시를 구하라고 명령 |
| 기원전 12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이우스가 도망치다 티베리스 나무다리에서 추격자와 맞서 친구들이 막아 줌 |
| 기원전 10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리우스가 압도적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어 곧 병력을 모음 |
| 기원전 10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리우스가 1월 초하루에 두 번째 집정관직과 개선식을 거행 |
| 기원전 100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리우스가 구하려 했으나 포룸에 내려온 이들이 처형됨 |
| 기원전 8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술피키우스가 무장 병력으로 집회 중인 집정관들을 공격 |
| 기원전 8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술라가 도시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원로원이 법무관 둘을 보냄 |
| 기원전 87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리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도시로 진군해 야니쿨룸 언덕을 점령 |
| 기원전 87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친나는 호위병과 입성하고 마리우스는 추방자라며 성문 밖에 멈춤 |
| 기원전 8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혼인 |
| 기원전 82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술라가 추방자를 숨겨 준 자도 사형에 처하고 처형자에게 상금을 약속 |
| 기원전 82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술라가 120년 만에 독재관직을 되살려 스스로 독재관을 선포 |
| 기원전 8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술라의 개선식은 왕실 전리품과 귀환 망명자들로 더욱 빛남 |
| 기원전 8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폼페이우스가 개선식을 요청했으나 술라가 반대 |
| 기원전 7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킬리키아에서 잠깐 복무한 뒤 술라 사망 소식에 레피두스의 소요를 기대하며 서둘러 로마로 귀환 |
| 기원전 7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술라 사후 루쿨루스가 코타와 함께 집정관이 됨(176올림피아드 무렵) |
| 기원전 72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원로원이 분노해 크라수스에게 전쟁 지휘를 맡김 |
| 기원전 7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폼페이우스에게 두 번째 개선식과 집정관직이 결의됨 |
| 기원전 70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폼페이우스가 집정관 후보가 되고 크라수스가 그의 지원을 구해 동료가 됨 |
| 기원전 66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호민관 만리우스가 폼페이우스에게 모든 권한을 주는 법을 발의 |
| 기원전 66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조영관 취임 며칠 전 크라수스·술라·아우트로니우스와 원로원 습격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음 |
| 기원전 65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조영관으로 포룸과 부속 회랑을 꾸미고 카피톨리움까지 임시 회랑으로 장식 |
| 기원전 6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상류층이 키케로를 집정관 후보로 내세우고 카틸리나는 낙선, 키케로·안토니우스 선출 |
| 기원전 63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귀국한 루쿨루스가 간청 끝에 개선식을 허락받음 |
| 기원전 63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토가 카틸리나 일당 처형을 놓고 원로원에서 연설함 |
| 기원전 63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틸리나가 무장 3백 명과 도시를 떠나 만리우스에게 합류 |
| 기원전 63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키케로가 렌툴루스를 감옥에 넘겨 사형 집행 명령 |
| 기원전 63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이집트 속주 획득 희망을 접고 막대한 뇌물로 대제관 선거에 출마 |
| 기원전 63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카틸리나 음모가 발각되자 엄벌론자들에게 후세의 비난을 상기시켜 집정관 당선자 실라누스가 제안을 완화하게 함 |
| 기원전 63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키케로와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이던 해 9월 23일 해 뜨기 직전 팔라티누스 구역에서 출생 |
| 기원전 61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이 이틀에 걸쳐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컸음 |
| 기원전 60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법무관 뒤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를 배정받아 평정하고, 후임을 기다리지 않고 개선식과 집정관직을 구하러 서둘러 귀환 |
| 기원전 59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두 사람의 지지로 카이사르가 곧 집정관에 선출 |
| 기원전 59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크라수스·폼페이우스의 우정에 힘입어 카이사르가 집정관 선거에 나섬 |
| 기원전 5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 |
| 기원전 5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장인과 사위의 후원으로 개선 기회가 많은 갈리아를 택했고, 원로원이 갈리아 코마타까지 추가로 맡김 |
| 기원전 5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클로디우스가 카토에게 키프로스 임무 외에 비잔티움 망명자 복귀까지 맡김 |
| 기원전 58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키케로의 도주가 알려지자 클로디우스가 추방 표결을 통과시킴 |
| 기원전 56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토가 배로 귀환하자 모든 관리·원로원·시민이 강가에 마중 나감 |
| 기원전 5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이듬해 카토가 법무관에 선출됨 |
| 기원전 5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클로디우스 살해로 공화정이 동요하자 원로원이 폼페이우스 단독 집정관을 의결 |
| 기원전 49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며칠 뒤 카이사르가 로마에 들어와 장악 |
| 기원전 49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아리미눔 점령 뒤 로마가 카토에게 눈을 돌림 |
| 기원전 46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이사르가 이집트·폰토스·아프리카 개선식을 거행 |
| 기원전 46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여러 전쟁의 승리로 다섯 번 개선식 — 스키피오 격파 뒤 한 달에 네 번, 첫째이자 가장 화려한 것은 갈리아 개선식 |
| 기원전 46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오랫동안 어지러워진 달력을 바로잡음 |
| 기원전 4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로마인이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 |
| 기원전 4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브루투스 일파가 카이사르 의자 뒤에 서고 틸리우스 킴베르가 청원 |
| 기원전 4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시신이 화장된다는 말에 카이사르의 친구 킨나가 전날의 환영 때문에 불안하고 열병 중이었는데도 직접 가 봄 |
| 기원전 4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카이사르가 개선복 차림으로 연단에 앉아 달리기를 구경 |
| 기원전 4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안토니우스의 조사에 분노한 군중이 벤치·탁자를 모아 포룸에서 카이사르 시신을 화장 |
| 기원전 4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이사르가 앉자마자 음모자들이 틸리우스 킴베르의 청원을 구실로 둘러쌈 |
| 기원전 44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사면이 결의된 뒤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 브루투스는 레피두스 집에서 대접받음 |
| 기원전 4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루페르칼리아에서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연단에서 거듭 왕관을 씌우자 그때마다 물리치고 카피톨리움 유피테르에게 보냄 |
| 기원전 4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자리에 앉자 공모자들이 인사하는 척 둘러서서 살해 — 시신을 티베리스에 끌어 던질 계획이었음 |
| 기원전 4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장례일을 공고하고 마르스 광장에 딸 율리아의 무덤 근처에 장작더미를 쌓아 장례를 치름 |
| 기원전 4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장례 직후 군중이 횃불을 들고 브루투스·카시우스 집으로 달려가고, 킨나를 잘못 알아보고 헬비우스 킨나를 살해 |
| 기원전 4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56세에 사망하여 신의 반열에 오름; 살해된 원로원 회의장은 폐쇄되고 3월 이데스를 부친살해일로 지정 |
| 기원전 43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3인이 합의한 뒤 3백 명을 추방 명단에 올려 처형 |
| 기원전 43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법정 연령 전에 군단을 로마 가까이에 진주시켜 집정관직을 요구하고 사절을 보냄 |
| 기원전 4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팔라티누스 구역에서 출생(대다수 사가의 설) — 폰디 출생설은 근거가 약하다고 함 |
| 기원전 40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안토니우스가 헤롯을 동정해 그를 왕으로 세우는 일에 카이사르와 함께 나섬 — 헤롯이 로마에서 왕 칭호를 얻음 |
| 기원전 40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이 로마 원로원에서 유대 왕으로 세워짐 |
| 기원전 32년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카이사르가 준비를 마치자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전쟁이 표결됨 |
| 기원전 30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선물로 병사를 얻고 곡물 보급을 구실로 남은 경쟁자를 눌러 한 사람만 따르는 체제가 시작되었다 |
| 기원전 2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야누스 퀴리누스 신전을 세 번 닫아 평화를 세우고, 달마티아·악티움·알렉산드리아 승전으로 개선식을 치름 |
| 기원전 2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수도를 개조해 마르스 울토르 신전이 있는 포룸, 팔라티누스 아폴론 신전, 카피톨리움 유피테르 토난스 신전 등 많은 건물을 세움 |
| 기원전 17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이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공부한 두 아들을 데려옴 |
| 기원전 12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이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로마까지 끌고 가 독살 음모로 카이사르 앞에서 고발 |
| 기원전 12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이 로마에서 두 아들을 카이사르 앞에 고소했다가 화해시킴 |
| 기원전 1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레피두스가 살아 있는 동안은 빼앗지 못한 대제관직을 그가 죽자마자 차지함 |
| 기원전 5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의 유언장을 지니고 로마로 파견됨 |
| 기원전 4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아르켈라오스와 안티파스가 로마로 가서 카이사르 앞에서 왕위를 다투고 니콜라오스가 아르켈라오스를 변호 |
| 기원전 4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카이사르가 양측 말을 듣고 헤롯의 나라를 아들들에게 나눠 주고 아르켈라오스를 에트나르크(분봉왕)로 세움 |
| 기원전 4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아르켈라오스와 안티파스가 왕위를 놓고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 앞에서 다툼 |
| 기원전 4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아우구스투스가 아르켈라오스를 왕이 아닌 영토 절반의 민족장(에트나르케스)으로 삼음 |
| 기원전 4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의 영토를 아르켈라오스·안티파스·필립포스에게 나누고 살로메에게 얌니아·아스돗 등을 줌 |
| 기원전 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인민이 일시에 한마음으로 「국부」 칭호를 바치고, 원로원이 메살라를 시켜 공식 전달 |
| 기원전 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딸과 손녀 두 율리아의 방탕이 심해 둘 다 추방 |
| 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로도스에서 거의 8년을 보내고 로마로 귀환 |
| 6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아르켈라오스 10년에 형제·유대인 지도자들이 카이사르에게 고소해 비엔나로 추방됨 |
| 1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독일에서 2년 뒤 돌아와 미뤄둔 개선식을 부장들과 함께 치르고, 판노니아 족장 바토를 라벤나로 보냄 |
| 13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사망 1년 4개월 전 4월 3일 루키우스 플란쿠스·가이우스 실리우스 집정관 해에 유언장을 작성 |
| 1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호민관 권한으로 원로원을 소집해 슬픈 연설을 시작하다 깊이 한숨짓고 말을 잇지 못하는 시늉을 함 |
| 1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아우구스투스 장례를 논의하고 베스타 여사제들이 가져온 유언장이 티베리우스와 리비아를 상속인으로 지정 |
| 1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정무관 선거가 마르스 광장에서 원로원으로 넘어감 |
| 17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바루스에게 잃은 군기 회수를 기념하는 아치를 사투르누스 신전 근처에 봉헌 |
| 17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동방 소요는 게르마니쿠스의 지혜로만 가라앉힌다고 설명 |
| 1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외국 종교와 이집트·유대 의식을 금하고 의복과 제기를 불사르게 하며 유대 청년들을 풍토병 지역 속주로 보냄 |
| 20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유골이 아우구스투스 묘에 안치되는 날 도시가 통곡으로 가득 |
| 20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원로원 모임에서 티베리우스가 신중한 연설로 피소 재판을 시작 |
| 22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티베리우스가 드루수스에게 호민관 권한 부여를 청함 |
| 22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아시아 총독 실라누스가 속주민에게 착취로 고발됨 |
| 23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티베리우스 통치 9년째, 평온한 가운데 세이아누스가 부상 |
| 23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흩어져 있던 근위대를 한 진영으로 집결시킴 |
| 23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세이아누스가 환관 리그두스를 시켜 서서히 듣는 독을 드루수스에게 먹임 |
| 2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집정관 바로가 실리우스와 아내 소시아를 공격 |
| 25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크레무티우스 코르두스가 브루투스·카시우스를 칭송한 역사서로 새 죄목으로 고발됨 |
| 26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아그리피나 파멸의 첫걸음으로 사촌 클라우디아 풀크라가 도미티우스 아페르에게 고발됨 |
| 27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대화재가 카일리우스 언덕을 잿더미로 만듦 |
| 2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리비아(율리아 아우구스타)가 고령으로 사망 |
| 3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세야누스의 음모를 알고도 곁에서 떼어놓으려 그를 자신의 다섯 번째 집정관 동료로 삼음 |
| 31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세이아누스 몰락 직후 원로원에서 44개 연설 — 서문이 단편으로만 남음 |
| 31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세이아누스의 남은 자녀들까지 처벌하기로 결정 |
| 32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곡물값 폭등으로 극장에서 황제에게 거센 요구가 터짐 |
| 33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스페인 최고 부자 섹스투스 마리우스가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던져짐 |
| 35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파르티아 귀족들이 왕 아르타바누스 몰래 로마에 옴 |
| 36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아그리파가 마차에서 티베리우스가 일찍 죽기를 빌다 해방노예의 고발로 사슬에 묶임 |
| 36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아벤티누스 언덕 근처 대경기장과 아벤티누스 구역이 불탐 |
| 37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자 아그리파를 결박에서 풀어 필리포스의 분봉령 왕으로 세움 |
| 37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사망 소식에 사람들이 「티베리우스를 티베리스로!」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님 |
| 37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로마에 입성하자 원로원과 인민이 함께 환호하고 원로원 회의장에 난입해 티베리우스의 유언(다른 손자를 공동상속인으로 지정)을 무효화 |
| 3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12월 30일(1월 칼렌다이 3일 전) 출생 |
| 40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귀환 길에 원로원 사절이 서둘러 돌아오라 청하자 개선식을 포기하거나 미루고 생일에 오바티오(소개선식)로 입성; 넉 달 안에 살해됨 |
| 41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가이우스가 3년 8개월을 통치하고 죽자 클라우디오스가 군영에서 추대되고 아그리파가 원로원과 사이를 중재 |
| 41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가이우스가 아그리파의 연회 간청에 따라 성전 상 건립을 거두고 페트로니우스에게 편지를 씀 |
| 41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궁정 호위대장 카이레아 등이 팔라티움 경기 중 가이우스를 암살함 |
| 41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군이 클라우디우스를 진영으로 데려가 황제로 추대하고 원로원은 아그리파의 중재로 굴복함 |
| 4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정오 직후 소년들과 이야기하는 사이 카이레아가 뒤에서 칼로 내리치고 호민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 등이 가슴을 찔러 살해 |
| 4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음모자들이 접근을 막은 가운데 헤르마이움이라는 방으로 물러났다가 50세에 뜻밖에 제위에 오름 |
| 47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메살리나가 두 번 집정관을 지낸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와 루쿨루스 정원을 노림 |
| 47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로마 건국 800년, 아우구스투스 이후 64년 만의 세기 경기가 열림 |
| 48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클라우디우스 6년에 로마 건국 800년이 크게 기념되고, 이집트에 피닉스가 나타났으며 아이가이오스 바다에 큰 섬이 솟았다 |
| 4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메살리나가 죽은 직후 식탁에 앉아 「황후는 왜 안 오느냐」고 물음 |
| 48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갈리아 코마타 유력자들이 원로원 의석 허용을 요구해 논의됨 |
| 48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황제가 원로원에서 조상의 예를 들어 갈리아인 수용을 연설 |
| 48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메살리나가 실리우스와 공공연히 혼인 의식을 올림 |
| 48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메살리나가 루쿨루스 정원에서 살길을 찾아 편지를 쓰며 버팀 |
| 48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메살리나가 단검을 목에 대다 호위대 장교의 일격으로 죽음 |
| 4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원로원이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피나의 혼인을 합법화하자 환호 |
| 4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혼인 당일 실라누스가 자살 |
| 4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파르티아 사절이 메헤르다테스 귀환을 청하러 원로원에 등장 |
| 4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로마로 압송된 미트리다테스가 황제 앞에서 당당히 말함 |
| 50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11세에 클라우디우스에게 입양돼 원로원 의원이 된 세네카에게 교육받음 |
| 50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팔라스의 영향으로 도미티우스(네로)의 입양이 서둘러짐 |
| 50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포로가 된 카라타쿠스가 황제 법정 앞에서 연설 |
| 5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여러 해 흉작이 이어진 곡물 부족기에 포룸 한복판에서 군중에게 욕설과 빵 조각 세례를 받음 |
| 5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10월 24일 로마 6구에서 출생 — 아버지는 집정관 당선자 |
| 53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열여섯 살 네로가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 |
| 54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아그리피나의 뜻대로 네로가 황제가 됨 |
| 5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64세, 재위 14년에 사망 — 후계 정리가 끝날 때까지 죽음을 숨김 |
| 5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클라우디우스 사망이 알려지자 근위 대대로 나가 궁 계단에서 병사들에게 황제로 환호받고 가마로 병영에 실려 감 |
| 5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클라우디우스를 성대히 장사 지내고 직접 추도사를 읽은 뒤 신격화 |
| 5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10월 13일 정오 궁전 문이 열리고 네로가 부루스와 함께 근위대 앞으로 나감 |
| 55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브리타니쿠스의 죽음과 장례가 같은 밤에 치러짐 |
| 58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포파이아 사비나가 오토와의 관계로 네로와 얽힘 |
| 58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세금 징수인 탐욕에 대한 민중 요구로 간접세 폐지 여부를 고민 |
| 60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그리스식 경기를 5년마다 로마에서 열도록 제정 |
| 62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부루스가 병 또는 독으로 사망 |
| 62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네로가 옥타비아를 내쫓고 포파이아와 결혼 준비 |
| 64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낡은 건물과 좁은 거리가 싫다며 도시에 공공연히 불을 놓음 |
| 6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사고인지 방화인지 불확실한 대화재가 대경기장 쪽에서 시작 |
| 6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닷새 만에 에스퀼리누스 기슭에서 건물을 헐어 화재를 멈춤 |
| 6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폐허를 이용해 네로가 보석과 금의 새 저택을 지음 |
| 64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방화 소문을 덮으려 그리스도 신자들을 처벌 |
| 65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한 가을에 리비티나 신전 장부에 3만 명이 기록된 역병 |
| 65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네르바·베스티누스 집정관 해, 피소 음모가 퍼짐 |
| 65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밀리쿠스가 세르빌리우스 정원 문을 두드리며 중대 밀고를 하려 함 |
| 65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세네카가 유언장을 쓰려 서판을 청했으나 거절당함 |
| 65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경기 직후 포파이아가 만삭의 몸으로 네로에게 걷어차여 죽음 |
| 66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티리다테스의 로마 입성 행렬 — 포룸에 대대가 정렬한 가운데 네로가 연단 위 곡의에 앉아 왕의 청에 따라 터번을 벗겨 관을 씌움 |
| 66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네로가 트라세아 파이투스와 바레아 소라누스를 제거하려 함 |
| 66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트라세아의 마지막 장면 |
| 6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모든 군대가 등을 돌렸다는 소식에 식탁을 뒤엎고 세르빌리우스 정원으로 가 독약을 챙기고 해방노예를 오스티아로 보내 함대 준비를 명함 |
| 6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자기 몸 크기의 구덩이를 파라 명하고 단검 두 자루의 날을 살피며 주저함 |
| 6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재위를 끝낸 날이 옥타비아를 죽인 날과 같았음 |
| 6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빈덱스의 죽음에 낙담해 자살까지 생각했으나, 네로가 죽고 모두가 충성 서약을 했다는 소식에 부관 칭호를 버리고 카이사르를 칭하며 로마로 진군 |
| 68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기회가 오자 갈바의 거사에 가담했고, 황제 자리를 노려 갈바를 만찬에 초대할 때마다 호위 대대 병사 모두에게 금화를 나눠줌 |
| 69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갈바가 군대를 달래러 나가다 쿠르티우스 호수 곁에서 오토의 사주로 죽었다 (재위 7개월 7일) |
| 69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크레모나에서 패한 비텔리우스는 속았다고 생각해 분노로 카피톨리움을 불태웠다 |
| 69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로마 시장 한복판에서 갈바가 죽고 오토가 황제가 되어 비텔리우스와 싸움 |
| 69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로마에서 사비누스가 카피톨리움을 점거했다가 비텔리우스군에게 공격받음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자식이 없어 업신여김받는다 여겨 젊은 귀족 피소를 아들이라 부르며 병영에서 입양했으나 하사금은 언급하지 않아 오토에게 기회를 줌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피살 전날 아침 제사 때 점쟁이가 암살자가 가까이 있다고 거듭 경고했으나 궁 안에 머물러 군단병 경비만 세움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73세, 재위 7개월에 살해 — 원로원이 살해된 포룸 자리의 해군 기둥 위에 동상을 세우라 했으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취소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피소가 떠나자마자 병영을 장악하고 궁에서 만찬 중인 갈바를 치려 했는데, 가이우스 피살 때와 네로 이탈 때 근무했던 같은 대대가 이번에도 경비 중이었음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저녁 무렵 원로원에 들어가 길에서 붙잡혀 강제로 추대됐다고 짧게 연설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나팔을 울리며 장군 외투에 검 차림으로 기치와 깃발을 앞세우고 로마에 입성, 알리아 패전일에 대제관직을 취함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작은 가마에 빵 굽는 자와 요리사 둘만 데리고 아벤티누스 언덕의 아버지 집으로 몰래 빠져나가 캄파니아로 달아나려 함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적 선봉이 궁을 수색하는 가운데 스칼라이 게모니아이에서 서서히 고문당해 죽고 갈고리로 티베리스에 끌려 던져짐 |
| 69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비텔리우스와의 전쟁에서 숙부 사비누스와 일부 병력과 함께 카피톨리움으로 피신했다가 신전이 불타자 밤새 신전지기 곁에 숨음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갈바가 두 번째 집정관직을 티투스 비니우스와 맡는 해로 저작을 시작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갈바가 피소의 손을 잡고 양자 입양 연설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1월 15일 갈바가 아폴로 신전 앞에서 제사할 때 점쟁이가 불길한 징조를 알림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근위대 진영에서 병사들이 오토를 황제로 맞이함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갈바가 쿠르티우스 호수 근처에서 죽음을 맞음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3월 14일 오토가 원로원에 국가를 맡기고 출전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케레스 경기 극장에서 오토의 죽음 소식이 전해짐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겁먹은 비텔리우스가 카이키나와 발렌스에게 출정 명령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사비누스 등이 카피톨리움에 모임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지휘관 없이 몰려든 병사들이 카피톨리움으로 돌진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내전 중 카피톨리움이 불탐 — 건국 이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시가전을 군중이 모의전처럼 구경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근위대 진영 공격이 가장 어려운 전투 |
| 69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비텔리우스가 칼에 몰려 끌려 다니며 죽음 |
| 70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1월 1일 원로원이 지휘관들에게 감사 결의 |
| 70년 | 타키투스 연대기·역사 | 카피톨리움 재건을 기사 계급 루키우스 베스티누스가 맡음 |
| 71년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의 개선식이 로마에서 열려 군대가 밤부터 행렬을 준비 |
| 7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로마로 돌아와 유대 승전 개선식을 치르고 집정관을 여덟 번 더 지냄; 승전·패전 양쪽 병사의 방종과 속주 혼란을 수습 |
| 7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포룸 곁 평화 신전과 아그리피나가 시작했다가 거의 허물어진 카일리우스 언덕의 클라우디우스 신전을 새로 지음 |
| 71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아버지와 함께 개선식을 치르고 감찰관·호민관직과 일곱 번의 집정관을 공동으로 지냄 |
| 75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서 카피톨리움, 평화의 신전, 클라우디우스 기념물, 거대한 원형경기장, 포룸을 짓거나 마무리했다 |
| 80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원형경기장을 봉헌하고 서둘러 지은 목욕장을 개관 |
| 80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재위 중의 참사: 로마의 대화재 |
| 80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재위 중의 참사: 역병 |
| 8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화재로 파괴된 많은 건물과 두 번째로 불탄 카피톨리움을 재건하고 유피테르 쿠스토스 신전·네르바 포룸 등을 세움 |
| 92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포도주는 넘치고 곡물은 모자란다며 포도 신규 식재를 금하는 포고를 냄 |
| 95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사촌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를 사소한 의심으로 집정관 임기 직후 처형 |
| 96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도미티아누스가 해방노예들의 모의와 아내의 가담으로 마흔다섯 살에 죽었다 |
| 96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죽기 전날 독일에서 온 점쟁이가 번개를 풀이해 정권 교체를 예언하자 재판해 처형하고 침실로 물러남 |
| 96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음모자들이 목욕 중 칠지 만찬 중 칠지 망설이자 도미틸라의 집사 스테파누스가 조언과 협력을 제안 |
| 96년 |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 민중은 거의 무관심했으나 병사들은 분노해 신격화를 요구하고 암살 가담자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 |
| 97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네르바가 「페르비움」이라 부르는 포룸(미네르바 신전이 솟은 곳)을 봉헌하고 열여섯 달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
| 98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1년 4개월 8일 재위 끝에 로마에서 죽었다 |
| 11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다키아 지휘를 투르보에게 맡기고 여론을 달래러 서둘러 로마로 감 |
| 11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사채·체납 세금을 면제하고 차용증을 트라야누스 광장에서 불태움 |
| 11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로마에서 판테온·바실리카·아우구스투스 광장 등을 복원하고 하드리아누스 다리·무덤을 짓고, 건축가 데크리아누스와 코끼리 24마리로 거상(巨像)을 옮김 |
| 135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에 아테나이움이라는 교양 학교를 세우고 아테네식으로 엘레우시스 비의를 도입했다 |
| 136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반대에도 케이오니우스 코모두스(아일리우스 베루스)를 입양하고 서커스 경기와 하사금을 베풂 |
| 13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아일리우스 베루스 사망 뒤 중병에 걸린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후일 피우스)를 입양하되 안니우스 베루스와 마르쿠스 안토니누스를 입양하는 조건을 붙임 |
| 13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1월 1일 감사 연설을 마친 아일리우스 베루스가 약을 마시고 그날 사망함 |
| 141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아내 파우스티나가 죽자(치세 3년) 원로원이 신격화하고 경기·신전·사제를 의결함 |
| 148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에 로마 건국 900년이 성대하게 기념되었다 |
| 161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원로원의 압력으로 통치를 맡은 마르쿠스가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를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로 공동 황제로 삼음 |
| 166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루키우스가 마르쿠스도 함께 개선하자고 요구해 두 황제가 개선식을 치름(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사후 게르마니쿠스만 칭함) |
| 166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시리아를 떠나기 싫어하며 로마로 돌아와 형과 개선식을 공유함 |
| 169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국고가 바닥난 마르쿠스가 속주·원로원에 세금을 물리지 않으려고 트라야누스 포룸에서 황실 금그릇·수정잔·비단옷·보석을 두 달간 경매로 팔았다 |
| 176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마르쿠스가 로마로 돌아와 연설 — 8아우레우스를 외치는 군중에게 8백 세스테르티우스씩 주고 45년치 국고 채무 증서를 포룸에서 소각 |
| 176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마르쿠스가 이미 카이사르로 세운 아들 콤모두스와 함께 로마에서 다시 개선식을 했다 |
| 176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로마에 이르러 개선하고 서둘러 라비니움으로 감 |
| 176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아버지와 함께 임페라토르로 환호받고 개선식을 치름 |
| 177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스키타이(북방) 사정이 다시 급해져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서둘러 크리스피나와 혼인시킴 |
| 178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마르쿠스가 벨로나 신전의 피 묻은 창을 던지는 의례 뒤 출정 — 파테르누스에게 대군을 주어 전선에 보내고 열 번째 임페라토르 환호 |
| 180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콤모두스가 로마에 들어서자 원로원과 시민이 월계수와 꽃을 들고 맞음. 유피테르 신전에 들른 뒤 궁으로 감 |
| 180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아버지가 거의 끝낸 전쟁을 적의 조건에 맞춰 접고 로마로 돌아와, 사오테루스와 개선 행렬을 함 |
| 181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콤모두스가 로마에 와 원로원에서 사소한 말을 늘어놓음 — 아버지를 진창에서 구했다는 허풍 |
| 182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원형경기장 입구에서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루킬라의 연인)가 콤모두스를 칼로 노리고 「이것이 원로원이 보낸 칼이다」 — 루킬라가 꾸민 일, 암살 실패 |
| 18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콤모두스가 부왕의 친구들을 물리고 이탈리아 출신 페렌니스를 근위대장으로 앉혀 정무를 맡김 |
| 18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누이 루킬라가 퀸티아누스를 꼬드겨 콤모두스 암살을 꾀함. 퀸티아누스가 극장 통로에서 단검을 뽑고 소리치다 붙잡힘 |
| 18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퀸티아누스의 외침이 콤모두스의 가슴에 박혀 이후 원로원 전체를 적으로 봄 |
| 18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콤모두스가 살비우스 율리아누스·타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와 한 귀부인 등 많은 이를 살해 — 율리아누스는 대군을 갖고도 반란을 꾸미지 않았음 |
| 185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브리타니아 군단이 1천5백 창병을 이탈리아로 보내 페렌니스를 고발 — 콤모두스가 그들 앞에 근위대장을 넘김 |
| 185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병사들 손에 구타·살해, 처자와 누이까지 죽음 |
| 185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카피톨리움 경기장에 철학자 차림의 사나이가 뛰어들어 「페렌니스의 칼이 목에 닿았다」고 외침. 페렌니스가 그를 잡아 죽임 |
| 185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브리타니아 군이 보낸 1500명의 창병이 페렌니스를 반역죄로 고발. 콤모두스가 그와 아들을 처형함 |
| 187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마테르누스가 군을 흩어 이탈리아로 숨어들어 대모신(키벨레) 축제 때 콤모두스를 노렸으나 동료의 밀고로 로마에서 붙잡혀 참수됨 |
| 189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로마에 역병 — 하루 2천 명이 죽은 날도 있었고, 독 바늘로 사람을 감염시키는 범죄자도 제국 전역에서 활동 |
| 190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기근 때 서커스에서 소녀 인솔의 아이들 외침으로 폭동, 콤모두스가 접에 질려 클레안데르와 그 아들을 죽이게 하고 군중이 시신을 끌고 다님 |
| 190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대장 클레안데르가 곡물을 사재기하고 값을 올려 굶주림을 키움(곡물 관리 파피리우스는 그의 아래) |
| 190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군중이 클레안데르를 내놓으라고 교외 별궁으로 몰려가자 기병대가 베어 가르고, 시민은 지붕에서 돌과 기와를 던져 맞섬. 로마 시내 시가전 |
| 190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누이 파딜라가 콤모두스에게 달려가 재난의 원인을 넘기라고 호소. 클레안데르가 목이 잘려 창에 꽂혀 돌려지고 소요가 가라앉음 |
| 190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분노한 시민을 견디지 못한 코모두스가 클레안데르를 군중에게 넘겨 처벌케 함 |
| 191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콤모두스가 로마를 「콤모디아나」, 군단을 「콤모두스 군단」으로 개명하고 헤라클레스를 자칭, 열두 달 이름까지 자기 칭호로 바꿈 |
| 191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콤모두스 사망 전조 — 평화 신전 부근 밤 화재가 번져 궁전 일부와 국가 기록 대부분이 소실 |
| 191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한밤의 불로 평화의 신전과 주변 건물이 타고 베스타 신전까지 번짐. 사람들은 전쟁이 올 징조라고 풀이함 |
| 192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콤모두스가 독살 시도에 실패하자 체육장에서 안마사에게 목이 졸려 죽었고 원로원은 이름을 지우도록 했다 |
| 192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콤모두스가 원형경기장에서 14일 연속 구경거리 — 첫날 혼자 곰 1백 마리를 사살하고 디오 등 원로원이 지켜봄 |
| 192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라이투스·에클렉토스·마르키아가 독살에 실패하자 운동선수 나르키소스에게 욕조에서 콤모두스를 교살하게 함(12년 9개월 14일 재위) |
| 19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콤모두스가 「헤라클레스, 유피테르의 아들」을 자칭하고 사자 가죽에 곤봉을 들고 다님. 달 이름도 바꿈 |
| 19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원형경기장에서 콤모두스가 높은 단 위에서 창과 화살로 짐승을 쓰러뜨림. 사자 100마리를 창 100개로 잡는 쇼도 함 |
| 19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콤모두스가 검투사 학교에서 검투사 차림으로 새해를 맞으러 나서려 하고, 마르키아·라이투스·에렉투스 등의 이름을 적은 사형 명단을 침상에 둠 |
| 19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어린 소년이 명단을 가져가 마르키아가 읽고 포도주에 독을 탐. 콤모두스가 토하자 나르키소스가 목을 졸라 숨지게 함. 13년 재위 끝 |
| 19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라이투스와 에렉투스 일행이 한밤에 페르티낙스의 집을 찾아가 황제 자리를 권함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페르티낙스가 비밀리에 근위대 막사로 가 1인당 1만2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약속하고 밤에 원로원에서 「병사들이 나를 황제로 부르지만 사임하겠다」고 선언 — 원로원이 진심으로 추대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페르티낙스가 황제로, 콤모두스는 공적(公敵)으로 선언 — 시신을 찢으려던 군중은 이미 묻혔다는 말에 동상만 훼손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국고에 백만 세스테르티우스뿐 — 페르티낙스가 콤모두스의 조상·무기·가구·총애자를 팔아 근위대에 약속금, 시민에게 1인 1백 데나리우스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근위대와 라이투스가 집정관 팔코를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 — 페르티낙스가 곡물 시찰에서 돌아와 원로원에 알리고 팔코의 목숨을 살림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병사 2백이 궁에 난입 — 페르티낙스는 설득하려 나갔다가 살해, 에클렉토스만 곁에서 싸우다 죽음(67세 가까이, 재위 87일)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근위대 막사 앞에서 제국 경매 — 율리아누스가 1인당 2만5천 세스테르티우스를 불러 술피키아누스를 이기고 황제로 받아들여짐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서커스에서 군중이 밤낮 율리아누스를 규탄하며 시리아의 니게르에게 구원을 외침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에 세베루스를 공적으로 선언하게 하고 교외에 방벽을 쌓아 도시가 진영으로 변함(코끼리·미세눔 수병 동원)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병사들이 페르티낙스 살해자들을 체포하고 원로원이 율리아누스를 사형 선고, 세베루스를 황제로 추대 — 율리아누스는 궁에서 살해(66일 재위)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세베루스가 로마에 들기 전에 페르티낙스 살해 근위대를 포위해 무장·말을 빼앗고 로마에서 추방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세베루스가 성문까지 기병복, 이후 도보 시민복으로 입성 — 꽃과 월계수로 장식된 도시, 전군이 무장행진 |
| 19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세베루스가 포룸에서 페르티낙스의 밀랍상 장례를 치러 신격화 — 마르스 광장 3층 화장대에 불을 붙이자 독수리가 날아오름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대 진영에서 라이투스가 콤모두스가 죽었다고 알리자 군중이 페르티낙스를 아우구스투스로 환호하고 병사들도 따름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페르티낙스가 개간지를 개간자에게 주고 10년 면세를 약속하며 관세·밀고자를 없애는 개혁을 시작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병들이 정오에 궁으로 난입. 페르티낙스가 연설로 달랬으나 일부가 덤벼 그를 죽임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병들이 진영 성벽 위에서 제국을 최고가 입찰자에게 팔겠다고 외침. 율리아누스가 올라가 병사당 큰 돈을 약속해 낙찰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병사들이 율리아누스를 호위해 궁으로 갔으나 시민은 돈으로 제국을 산 그를 욕하며 멀리서 따름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이탈리아 도시들이 월계수를 들고 문을 열어 세베루스를 맞음. 율리아누스는 지키지 못함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원로원이 세베루스를 단독 황제로 선포하고 보낸 호민관이 홀로 남은 율리아누스를 죽임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근위병들을 무기 없이 월계수만 들고 나오게 해 창으로 에워싸 가두고 꾸짖은 뒤 무장과 허리띠를 벗겨 쫓아냄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싸움 한 번 없이 로마에 입성. 원로원과 시민이 월계수로 맞음 |
| 193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하사금을 나눠주고 새 근위대를 뽑은 뒤 이탈리아에서 신병을 모아 동방 원정을 준비. 일리리아 군은 트라키아로 내려와 합류시킴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민중·원로원이 코모두스 시신을 갈고리로 끌어 티베리스에 던지라 했으나 페르티낙스의 명으로 하드리아누스 묘에 안치됨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밤중에 원로원으로 가 콩코르디아 신전에 앉았고, 폼페이아누스가 제위를 권했으나 사양, 아침에 의원들이 몰려와 황제로 환호함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페르티낙스가 3월 28일(원문: 4월 칼렌다이 5일 전) 살해됨; 향년 60세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페르티낙스 사후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이 닫힌 것을 보고 두 대대장에게 끌려 근위대 병영에 이르러 술피키아누스와 황제 자리를 다툼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병사 집회 뒤 저녁에 원로원에 가 무조건 몸을 맡기자 원로원 결의로 황제로 환호받고 호민관 권한·프로콘술 권한을 받음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원로원 사절단의 노력으로 율리아누스가 궁정에서 일개 병사에게 살해됨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무장한 채 로마에 들어와 카피톨리움과 궁정에 올랐고, 이튿날 무장 병사와 친구들과 함께 원로원에 나가 황제권 장악의 이유를 설명함 |
| 19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세베루스가 로마에 셉티조니움과 세베루스 목욕탕 등을 지음(셉티미우스 목욕탕은 수로가 무너져 쓸모 없었음) |
| 195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알비누스를 공개 전쟁으로 칠 구실이 없자 은밀히 제거하려 함 |
| 196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사투르날리아 직전 마지막 경마에서 군중이 일제히 「언제까지 이런 일을 겪고 언제까지 전쟁을 하나」 외침 — 하늘의 불·은빛 비 등 불길한 징조 |
| 196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군 앞에서 니게르를 친 이유를 설명하며 알비누스의 배신을 같은 방식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선동 |
| 197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세베루스가 술라·마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가혹함을 칭송하고 콤모두스를 변호하는 연설 뒤 알비누스 편 35인을 풀어 주고 29인(페르티낙스의 장인 술피키아누스 포함)을 사형 |
| 197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말을 타고 로마에 들어서자 시민은 월계수로 맞고 원로원은 호칭을 바침 |
| 197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검투 경기와 하사금을 베푼 뒤 파르티아 전쟁에 출발함 |
| 19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병사들에게 곡물 배급·금반지·아내와 동거를 허락해 군 기강을 풀어 놓았다고 헤로디아노스가 비판 |
| 202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세베루스 재위 10주년 — 시민·근위대에게 재위 햇수만큼 금화를 주고 안토니누스와 플라우틸라의 혼례, 7일간 맹수 7백 마리 사냥 구경거리 |
| 204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세베루스가 세속경기를 열고 수백 마리 맹수를 잡는 큰 구경거리와 잦은 하사금으로 시민을 달램 |
| 204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세베루스가 두 아들 안토니누스·게타와 함께 칠로·리보 집정관 해에 110년 주기 세기제(루디 사이쿨라레스)를 다시 열었다 |
| 205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안토니누스가 꾸민 음모 고발로 부름받은 플라우티아누스가 궁에서 살해, 시신은 거리에 던져졌다가 세베루스 명령으로 매장 |
| 205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플라우티아누스가 황제 부자를 죽일 음모로 호민관을 보냈다 들통나 황궁으로 불려가 살해됨. 시신은 거리에 버려짐 |
| 211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안토니누스가 어머니 거처로 불러 화해시키려는 척 동생 게타를 데려가 백인대장들이 어머니 품 안에서 게타를 살해(22세 9개월) |
| 211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안토니누스가 막사로 달려가 병사들에게 약속을 쏟은 뒤 게타 편 해방노예·병사 약 2만 명(남녀)을 궁에서 죽이고 파피니아누스 등 명사를 살해 |
| 211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로마에서 세베루스의 장례와 신격화. 불탄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날아올라 영혼을 하늘로 옮긴다고 믿음 |
| 211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두 형제가 궁을 갈라 쓰고 서로 독을 의심해 식탁도 따로 함. 군과 관리들이 두 파로 갈림 |
| 211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게타 살해 뒤 카라칼라가 근위대에 「동생이 무장한 자들과 나를 덮쳤다」고 변명함 |
| 211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부친 사후 카라칼라가 근위병영에서 동생이 음모를 꾸민다고 호소한 뒤 궁정에서 동생을 죽이고 시신을 곧 태우게 함 |
| 21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카라칼라가 게타의 측근 수많은 사람을 죽임. 근위대장이자 법학자 파피니아누스도 포함 |
| 212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파트루이누스가 피우스 신전 앞에서 살해되고 파피니아누스와 그 아들(재무관)도 살해되어 시신이 거리에서 끌려다님 |
| 212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로마에 카라칼라 목욕탕을 지음; 건축가들이 둥근 방(cella soliaris)은 재현할 수 없다고 함 |
| 216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카라칼라가 로마에 훌륭한 목욕장(안토니누스 욕장)을 지었으나 달리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다 |
| 217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불카날리아 날 벼락이 원형경기장을 쳐 윗층과 경기장 안이 모두 불타고 수도관을 비워도 못 껐음 — 같은 날 테베레 범람 |
| 219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엘라가발루스 숭배 — 신을 유피테르보다 앞세우고 스스로 사제가 되어 할례와 돼지고기 금기를 지켜 「아시리아인」이라 불림 |
| 219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엘라가발루스가 마이사의 재촉으로 로마를 향해 떠남 |
| 219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로마에 들어서자 속주 일을 팽개치고 엘라가발루스 신을 팔라티누스 언덕에 안치해 신전을 지음 |
| 220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엘라가발루스가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혼인(잔치·검투·호랑이 51마리 도살) 뒤 이혼하고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와 동거 |
| 220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엘라가발루스가 신 엘라가발루스의 아내로 카르타고의 우라니아를 불러 궁에 두고 혼례 선물을 거둠 |
| 220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엘라가발루스가 흑석 신상을 황금 모래 깐 길로 옮기는 행렬을 하고 시민이 횃불과 꽃으로 따름 |
| 220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엘라가발루스가 베스타 여사제와 혼인하며 사제와 여사제의 혼인이 알맞다고 둘러댐 |
| 221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엘라가발루스가 사촌 바시아누스를 원로원에 데려와 마에사·소아이미아스를 양옆에 두고 양자로 삼고 신의 명이라며 알렉산데르로 개명 |
| 221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병사들이 엘라가발루스의 여장과 춤을 경멸해 신중한 알렉산데르에게 마음을 옮기고 그를 지킴. 모후 맘마이아가 음식도 직접 살핌 |
| 221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입양했던 알렉산데르를 후회해 내치고 원로원에 카이사르 칭호를 박탈하라 명했으나 침묵뿐이었음 |
| 222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엘라가발루스가 군영(근위대 막사)에서 재위 30개월 만에 죽임을 당했다 |
| 222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엘라가발루스가 알렉산데르를 해치려다 근위대 소요 — 병영에서 상자에 숨어 달아나려다 발각되어 18세에 살해, 어머니도 함께 죽고 시신은 끌려다니다 테베레에 던져짐 |
| 222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알렉산데르가 곧바로 황제가 되어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에게 근위대와 제국 업무를 맡김 |
| 22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대 진영에서 병사들이 알렉산데르만 환호하자 격분한 엘라가발루스가 소란꾼을 벌하려 하자 병사들이 그와 어머니를 죽임. 시신은 시궁에 던져짐 |
| 22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병사들이 알렉산데르를 황제로 선포해 궁에 들임. 아직 어린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지도 아래 있음 |
| 222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알렉산데르가 학식 있는 법관과 전쟁 경험 있는 장교로 관직을 채움. 모후가 유혹하는 자를 궁에서 멀리함 |
| 222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엘라가발루스의 시신이 하수구에 들어가지 않자 추를 달아 아이밀리우스 다리에서 티베리스에 던짐 |
| 222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3월 노나이 하루 전, 콩코르디아 신전 원로원 회의에서 알렉산데르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음 |
| 22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울피아누스가 플라비아누스·크레스투스를 죽이고 그 자리를 이었으나 곧 근위대에게 밤에 공격받아 궁으로 도망쳤으나 살해 |
| 223년 |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울피아누스 생전에 시민과 근위대가 사소한 일로 사흘간 시가전 — 병사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려 하자 시민이 화평 |
| 233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로마로 돌아와 성대한 개선식을 치르고 원로원에 '페르시아를 이겼다'고 보고함(9월 25일 기록) |
| 234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게르마니아 전쟁에 출발할 때 시민과 원로원이 100~150마일을 배웅함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고르디아누스가 보낸 재무관 일행이 막시미누스의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에게 비밀 서한을 핑계로 다가가 찔러 죽임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원로원이 속주 총독들에게 사자를 보냄. 대부분 막시미누스 편 관리를 죽이고 로마 편에 섰으나 일부는 사자를 죽이거나 막시미누스에게 보냄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원로원이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뽑음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시민의 요구에 소년 고르디아누스(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를 데려오게 해 카이사르로 삼음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시민이 검투사까지 끌어모아 근위대 진영을 공격하나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반격해 검투사와 군중이 쓰러짐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도시의 상당 부분이 불에 탐. 약탈은 군중 틈에 섞인 하층민이 함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막시미누스 죽음의 소식에 로마 시민이 환희로 뛰쳐나오고 발비누스가 제물을 바침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대는 황제가 곁에 둔 게르만 호위를 의심하다가 카피톨리움 경기 중 소요를 일으킴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병이 궁에 난입해 두 노황제의 옷을 찢고 몸을 훼손한 뒤 죽여 거리에 버림 |
| 238년 | 헤로디아노스 로마 제국사 | 근위병이 소년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환호하고 시민에게 「싫은 둘을 없앴을 뿐」이라 외침 |
| 23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6월 26일(칼렌다이 6일 전)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에서 원로원이 모여 아프리카의 고르디아누스 서한을 낭독함 |
| 23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막시무스와 발비누스가 민중에게 아우구스투스로 환호받고 고르디아누스 손자가 카이사르가 됨; 막시무스 출정 뒤 근위대와 시민 충돌로 도시 대부분이 불탐 전승 |
| 23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제사와 경기를 마친 막시무스가 카피톨리움에서 서원한 뒤 대군을 이끌고 막시미누스를 치러 출발함 전승 |
| 23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막시무스는 파르티아, 발비누스는 게르만 정벌로 정해졌으나 병사들이 어린 고르디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환호하고 병영으로 감 |
| 238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막시무스와 발비누스가 병사 폭동으로 살해되고 고르디아누스 3세가 아우구스투스가 됨(HA는 그들이 2년 통치했다고 서술) |
| 242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야누스 문을 열고 페르시아 원정에 출발해 모이시아로 행군, 트라키아의 적을 몰아냄 |
| 248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필리푸스 부자가 로마에서 건국 1000년을 모든 종류의 경기로 기념했다 |
| 248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필리푸스 부자 치세에 로마 건국 1000년을 크게 차린 경기와 구경거리로 기념했다 |
| 260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스키타이가 이탈리아로 들어와 로마를 위협하자 원로원이 도시의 병사와 건장한 평민을 무장시켜 야만족보다 많은 군대를 만들었고 그들은 로마를 두고 이탈리아 다른 곳을 약탈했다 |
| 262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갈리에누스·파우시아누스 집정관 해에 큰 지진과 며칠간의 어둠, 아시아 도시 피해, 로마와 아카이아 도시들에 하루 5천 명이 죽는 역병이 번짐 전승 |
| 262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비잔티온 학살 뒤 서둘러 로마로 가 원로원을 소집, 10년 축제를 거행하고 코끼리·검투사·고트·사르마티아·프랑크·페르시아를 본뜬 행렬을 벌임 |
| 271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로마에서 화폐 기술자들이 펠리키시무스 아래 위조 뒤 두려워 반란했고 코일리우스 언덕에서 싸워 병사 7천 가까이를 잃었다 |
| 271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로마에서 조폐국 직원들이 화폐를 위조하고 재정관 펠리키시무스를 죽이고 반란하자 아우렐리아누스가 극심한 가혹함으로 진압하고 귀족 여럿을 처형했다 |
| 271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를 더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고 금과 보석을 가득 넣은 태양 신전을 지었다 |
| 271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마르코마니 전쟁 뒤 로마로 진군해 반란 주동자를 가혹하게 처형하고, 원로원과 상의해 로마 성벽을 확장함 |
| 271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황제 금고 관리자 펠리키시무스가 이끈 조폐공 반란을 진압하다 병사 7천 명이 전사함 전승 |
| 271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알라만니의 이탈리아 침입을 걱정한 아우렐리아누스가 이스테르 부근에서 야만족 수천을 죽이고 성벽이 없던 로마에 성벽을 두르기 시작해 프로부스 때 마쳤다 |
| 274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 태양 신전을 세워 선물로 장식하고 도시를 넓은 둘레의 튼튼한 성벽으로 에워쌌다 |
| 274년 | 에우트로피우스 로마사 개요 |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 들어와 동방과 서방을 되찾은 자로서 개선식을 했고 테트리쿠스와 제노비아가 전차 앞에서 걸어갔다 |
| 274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아우렐리아누스가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급인 테트리쿠스를 제노비아와 함께 개선 행렬에 끌고 갔으나 곧 이탈리아 감독관으로 삼음 |
| 274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동방과 서방에 대한 개선식: 오다이나투스·페르시아 왕·제노비아의 전차, 코끼리 20마리, 아마존이라 한 고트 여성들, 붉은 외투의 테트리쿠스 부자와 황금 사슬의 제노비아가 행진함 |
| 274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하고 팔미라에서 가져온 전리품으로 태양 신전을 지어 해와 벨루스의 상을 세웠다 |
| 281년 | 황제 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게르만과 블렘미에스를 이긴 개선식을 치르고 서커스에 타조·사슴·멧돼지 각 천 마리 등을 풀어 시민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함 전승 |
| 306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로마에서 평민과 근위대가 아버지 헤르쿨리우스의 오랜 반대에도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확인했다 |
| 306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막센티우스가 두 군사 호민관과 돼지고기 배급 담당자 루키아누스, 근위병들의 도움으로 황제로 추대되고 반대한 도시 장관 아벨리우스를 먼저 죽였다 |
| 312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로마 앞 들판에서 콘스탄티누스 기병이 막센티우스 기병을 흩었고, 막센티우스는 다리로 도망치다 다리가 무너져 강물에 빠져 죽었으며 그의 머리가 창에 꿰어 시내로 들어왔다 |
| 326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로마에 온 콘스탄티누스는 아들 크리스푸스를 계모 파우스타와의 불륜 혐의로 죽이고, 슬퍼한 어머니 헬레나를 위로한다며 파우스타를 달군 욕탕에 가두어 죽게 했다고 조시모스는 쓴다 |
| 326년 | 조시모스 새 역사 | 죄를 씻을 길을 못 찾은 콘스탄티누스가 에스파냐인 아이귑티우스의 말대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군이 카피톨리움에 오르는 축제에서 의식을 모욕해 원로원과 민중의 미움을 샀다 |
| 348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저자 시대인 1100년째에는 아무 행사 없이 지나갔다 (필리푸스 집정관 해) |
| 350년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대하여 | 로마에서 플라비우스 가문과 연이 닿은 네포티아누스가 도시 장관을 죽이고 검투사 무리로 황제를 자칭해 거리와 신전을 시체로 채웠다 |
| 411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로마가 고트족에 함락됨 — 이후 로마인이 브리튼 지배를 그침 |
| 455년 | 프로코피우스 | 가이세리코스가 대함대로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를 점령 — 막시무스는 돌에 맞아 죽음 |
| 536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가 아시나리아 문으로 로마 입성하고 고트는 플라미니아 문으로 철수 — 60년 만에 로마가 로마인 손에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고트 총동원 소식에 벨리사리우스가 고심 — 테베레 다리(밀비우스)에서 대응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고트가 다리 탑 문을 쉽게 부수고 건넘 — 벨리사리우스 기병 1000과 교전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고트가 로마 포위 시작 — 방책 6곳을 쌓음, 로마는 문마다 수비 배치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포위 18일째 아침 고트가 공성탑·망치로 성벽 공격 — 벨리사리우스는 웃으며 병사를 안심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가 황제에게 '로마를 확보했으나 병력이 흩어졌다'며 증원을 요청하는 서한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로마군이 연승에 취해 총력전을 원하나 벨리사리우스는 소규모 출격만 고집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비티기스가 고트 전원을 무장시켜 네로 평원 일대에서 대회전 준비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로마군이 전면전을 피하고 기병 습격으로 야만인을 이김 — 베사스 활약 |
| 537년 | 프로코피우스 | 하지 무렵 로마에 기근과 역병 — 고트는 전투를 피하고 지구전 |
| 538년 | 프로코피우스 | 야만인은 역병·굶주림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 방도를 논의 |
| 538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 사이에 프레시디오스 사건으로 불화 |
| 538년 | 프로코피우스 | 고트가 핀키아나 문 가까운 수도관으로 야간 침투 시도 |
| 538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가 하지 무렵 비티기스 진영으로 출동, 로마에는 소수만 남김 |
| 545년 | 프로코피우스 | 토틸라가 로마에 접근해 포위 — 농민은 해치지 않고 세금을 받겠다 선언 |
| 546년 | 프로코피우스 | 펠라기우스가 토틸라에게 휴전을 청했으나 허사 — 로마의 기근 악화 |
| 546년 | 프로코피우스 | 베사스가 곡물을 되팔며 방비를 소홀히 함 — 이사우리아 수비병이 토틸라에게 성문을 열어 로마 함락(12월 17일) |
| 547년 | 프로코피우스 | 벨리사리우스가 소수 수비만 두고 로마에 들어와 무너진 성벽을 급히 수습 — 대담한 재점령 |
| 547년 | 프로코피우스 | 요하네스가 아케론티스 요새를 포위하다 토틸라가 로마 성벽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용감한 구원 시도 |
| 550년 | 프로코피우스 | 토틸라가 로마를 포위 — 디오게네스가 이끄는 정예 3000이 수비하나 이사우리아가 문을 열어줌 |
| 552년 | 프로코피우스 | 나르세스가 승리 후 로마를 접수하고 항복받음 — 26번째 해에 요새 항복 |
| 553년 | 프로코피우스 | 로마 원로원·시민에게 이 승리가 오히려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고 논평 |
| 596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수도사들을 잉글랜드 민족 선교에 파견함 |
| 601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제 로렌시우스와 수도사 베드로를 로마로 보내 교황에게 보고하고 물음에 대한 답을 받음 |
| 601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팔륨과 편지, 멜리투스 등 후속 인원을 보냄 |
| 601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이 브리튼으로 가는 멜리투스 편에 이교 신전을 파괴하지 말고 교회로 바꾸라는 편지를 보냄 |
| 601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이 에텔베르트 왕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냄 |
| 604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 그레고리우스 서거 |
| 610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멜리투스가 로마에 가 교황 보니파키우스의 주교회의에 참석함 |
| 624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 보니파키우스가 유스투스에게 팔륨과 편지를 보냄 |
| 625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 보니파키우스가 에드윈 왕에게 믿음을 권하는 편지를 보냄(왕비에게도 편지) |
| 634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 호노리우스가 에드윈에게 격려 서신을, 파울리누스에게 팔륨을 보냄 |
| 640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당선자) 요한이 스코트인에게 부활절 날짜와 펠라기우스 이단에 대한 편지를 보냄 |
| 667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사제 위가르드가 대주교 서품을 받으러 로마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음; 교황이 서신을 보냄 |
| 668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교황 비탈리아누스가 테오도르를 대주교로 서품해 아드리안과 함께 브리튼에 보냄 |
| 688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서색슨 왕 카드왈라가 로마에 가 교황 세르기우스에게 세례받고 곧 서거함 |
| 692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윌리브로드가 로마에서 프리슬란트 주교로 서품받음; 수이드베르트는 브리튼에서 서품 |
| 709년 |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머시아 왕 코인레드와 이스트 색슨 왕 오파가 로마에서 수도복을 입고 생을 마침 |
| 749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뷔르츠부르크 주교 부르카르두스와 사제 폴라두스가 로마의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파견되어 왕권을 두고 자문함. 교황은 실권을 쥔 자를 왕이라 부르는 것이 낫다 하고 피핀을 왕으로 세우라 허락함 |
| 781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카를이 로마에서 부활절을 지내며 교황 하드리아누스가 아들 피핀에게 세례를 주고 왕으로 도유하고 또 루도비쿠스도 도유해 왕관을 씌움. 피핀은 이탈리아, 루도비쿠스는 아퀴타니아 왕이 됨 |
| 787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바이에른 공 타실로의 사절이 교황에게 화해의 중재를 청했으나 왕이 권한 확인을 요구하니 사절이 답변권이 없다고 함. 교황이 약속을 어기면 파문하겠다고 선언하고 일은 무산됨. 왕은 사도 묘를 참배하고 프랑크로 돌아감 |
| 796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하드리아누스가 죽고 레오가 교황직에 올라 사절로 성 베드로의 열쇠와 로마시 깃발을 왕에게 보내 로마인에게 충성 서약을 받을 귀족을 요청함. 앙길베르투스가 파견되었고, 프리울리 공 에리쿠스가 훈 왕궁(링)에서 얻은 보물 일부를 성 베드로에게 보냄 |
| 799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연도 행렬 중 로마인들이 놓은 매복에 걸린 교황 레오가 말에서 떨어지고 눈이 뽑히고 혀가 잘렸다고 전해짐. 밤에 성벽으로 탈출해 스폴레토 공 위니기수스에게 구출되어 스폴레토로 옮겨짐 |
| 800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카를이 노멘툼에서 영접한 교황 레오의 인도로 11월 24일 성 베드로 성당 계단에서 성직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입성함 |
| 800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성탄절 미사에서 교황 레오가 카를의 머리에 관을 씌우자 로마 사람들이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로마인의 황제」라 환호하고, 교황이 옛 군주처럼 경배한 뒤 카를이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버리고 황제·아우구스투스라 불림 |
| 815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로마인들이 병든 교황 레오가 세운 새 농장들을 약탈·방화하고 로마로 쳐들어가려 하자 베르나르두스 왕이 스폴레토 공 위니기수스를 보내 폭동을 진압함 |
| 823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이탈리아에서 정의를 집행하던 로타리우스가 교황 파스칼리스의 청으로 로마에 가 부활절(4월 5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국의 관과 황제·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파비아를 거쳐 6월 아버지에게 돌아옴 |
| 823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로마 교황청 관리 테오도루스와 사위 레오가 라테라노 궁에서 눈이 뽑힌 뒤 참수된 일(황제 쪽을 편든 탓, 교황 파스칼리스의 명이라는 의혹)이 황제에게 전해짐. 교황은 서약으로 결백을 선언하고 살해자는 베드로 가문이라 정당하다 주장함 |
| 824년 | 프랑크 왕국 연대기 | 교황 파스칼리스가 죽고 에우게니우스가 서임되자 황제가 로타리우스를 8월 중순 이후 로마로 보내 새 교황·로마인과 일을 정하게 함. 로타리우스는 에우게니우스에게 영접받아 로마의 질서를 바로잡음 |
| 1081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하인리히가 로마 진군에 나서며 로베르에게 동맹을 청함 |
| 1084년 | 안나 콤네나 「알렉시아스」 | 로베르가 알라마니아 왕을 막으려 서둘러 로마로 가서 교황군과 합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