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중국 · 좌표: 32.013, 112.128 · 사건 63건
| 해 | 사료 | 내용 |
|---|---|---|
| 192년 | 후한서(後漢書) 본기 | 손견이 양양에서 유표를 공격하다 전사하고 계교에서 공손찬이 원소에게 대패함 |
| 192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袁術의 명으로 荊州 劉表를 치던 孫堅이 襄陽을 포위하고 峴山을 홀로 가다 黃祖 군사의 화살에 맞아 죽음 |
| 208년 | 자치통감 | 형주 장릉태수 괴월·동조연 부손 등이 유종에게 조조에 항복을 권하며 순역·강약의 큰 틀을 들어 유비로는 조공을 당할 수 없다고 주장함 |
| 226년 | 삼국지(三國志) 정사 | 吳將 諸葛瑾·張霸가 襄陽을 침범하자 司馬懿가 격파하고 張霸를 벰 |
| 226년 | 자치통감 | 吳 左將軍 諸葛瑾 등이 襄陽을 침범하자 司馬懿가 격파하고 部將 張霸를 참수 |
| 268년 | 진서(晉書) 제기 | 오나라 施績이 江夏로 들어오고 萬郁이 襄陽을 침. 義陽王 望이 龍陂에 주둔, 荊州刺史 胡烈이 萬郁을 격파 |
| 269년 | 자치통감 | 吳를 멸할 뜻을 둔 武帝가 壬寅 羊祜를 荊州 都督으로 삼아 襄陽을 지키게 함 |
| 330년 | 진서(晉書) 제기 | 石勒이 황제 즉위, 郭敬을 보내 襄陽을 침 |
| 343년 | 진서(晉書) 제기 | 安西將軍 庾翼이 征討大都督으로 襄陽으로 옮겨 진주 |
| 379년 | 진서(晉書) 제기 | 苻堅의 아들 丕가 襄陽을 함락, 南中郎將 朱序를 사로잡음 |
| 382년 | 자치통감 | 桓沖이 揚威將軍 朱綽에게 秦 荊州刺史 都貴를 襄陽에서 치게 해 沔北 둔전을 불태워 짓밟고 600여 호를 약탈해 돌아옴 |
| 383년 | 자치통감 | 여름 5월 桓沖이 10만으로 秦을 쳐 襄陽을 공격하고, 劉波 등에게 沔北 여러 성을, 楊亮에게 蜀을 쳐 5성을 함락한 뒤 涪城을, 郭銓에게 武當을 공격하게 함 |
| 403년 | 자치통감 | 新野人 庾仄이 殷仲堪의 무리로 桓偉가 죽고 石康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기병해 雍州刺史 馮該를 襄陽에서 습격해 쫓아냄 |
| 405년 | 진서(晉書) 제기 | 南陽太守 魯宗之가 의병을 일으켜 襄陽을 습격해 격파 |
| 405년 | 자치통감 | 봄 정월 南陽太守 魯宗之가 기병해 襄陽을 습격하자 桓蔚가 江陵으로 달아남 |
| 445년 | 송서(宋書) 본기 | 옹주자사 무릉왕 준이 면수 일대 만족을 쳐 1만4천여 명을 서울로 옮김 |
| 461년 | 남사(南史) 본기 | 雍州刺史 海陵王 休茂가 사마 庾深之를 죽이고 거병했다가 參軍 尹玄慶에게 베임 |
| 461년 | 송서(宋書) 본기 | 옹주자사 해릉왕 휴무가 사마 유심지를 죽이고 거병했으나 의성태수 설계고가 토벌해 목을 벰 |
| 467년 | 송서(宋書) 본기 | 설안도의 아들 백령이 옹주 4군을 약취하나 자사 파릉왕 휴약이 토벌해 목을 벰 |
| 493년 | 남제서(南齊書) 본기 | 雍州刺史 王奐이 처형됨 |
| 493년 | 자치통감 | 옹주 자사 왕환을 사마 황요기·배숙업이 성 안에서 일으킨 병으로 참수(3월) |
| 497년 | 남제서(南齊書) 본기 | 度支尚書 崔慧景이 군을 이끌고 雍州를 구원하러 감 |
| 498년 | 남제서(南齊書) 본기 | 沔北 여러 군이 虜에 함락되자 太尉 陳顯達을 보내 雍州를 구원 |
| 498년 | 자치통감 | 최혜경·소연이 등성에서 북위군에 대패, 병사가 도랑에 빠져 죽음(3월) |
| 500년 | 남제서(南齊書) 본기 | 雍州刺史 梁王이 襄陽에서 의병을 일으킴 |
| 500년 | 남사(南史) 본기 | 雍州刺史 蕭衍이 襄陽에서 거병 |
| 501년 | 남사(南史) 본기 | 蕭衍이 襄陽을 떠나 동쪽으로 출발 (아우 偉에게 襄陽 수비를 맡김) |
| 504년 | 자치통감 | 북위가 번성에서 양군 승병을 대파, 4천여 참수·포로(3월) |
| 509년 | 자치통감 | 북위 형주자사 원지의 7만이 잠구에서 양군에 대파되어 1만여 참수(3월) |
| 533년 | 자치통감 | 북위 형주자사 하발승이 옹주를 침입해 하미수를 함락, 한남 진동 |
| 554년 | 양서(梁書) 본기 | 위군이 양양에 이르고 소찰이 무리를 이끌고 합류 |
| 554년 | 남사(南史) 본기 | 西魏군이 襄陽에 이르자 梁王 蕭察가 군을 이끌고 합류 |
| 588년 | 수서(隋書) 제기 | 晉王은 六合, 秦王은 襄陽, 楊素는 信州 등 여러 길로 출병, 총관 90명·병력 51만8천 |
| 781년 | 구당서(舊唐書) 본기 | 이희열이 양양을 공격해 양숭의를 죽임 |
| 781년 | 자치통감 | 이희열이 양숭의를 격파, 양숭의는 처와 함께 우물에 투신해 죽음 |
| 905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楊師厚가 襄州를 깨뜨려 趙匡凝가 淮南으로 달아나고 荊南까지 거둠 |
| 909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9월 丁酉 그 성을 함락하고 반란병 천 명을 베며 李洪·楊虔 등을 잡아 洛陽으로 보내 참수 |
| 909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陳暉가 襄州의 군란을 평정하고 首惡 李洪을 잡음 |
| 941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본기 | 丁丑 襄州 安從進이 군을 일으켜 반란, 西京留守 高行周를 南面行營都部署로 삼아 토벌하게 함 |
| 941년 | 자치통감 | 安從進이 鄧州를 공격하다 花山에서 대패, 襄州로 돌아가 농성 |
| 942년 | 신오대사(新五代史) 본기 | 高行周가 襄州를 이김(安從進 자분) |
| 942년 | 자치통감 | 高行周가 襄州를 1년 넘게 포위한 끝에 함락, 安從進은 일족과 분신 자결 |
| 1134년 | 속자치통감 | 7월 정축, 유예가 악비의 양양 수복 소식을 듣고 금에 출병을 청하나, 금은 한소주 등 송 사신이 막 와 있어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함 |
| 1206년 | 금사(金史) 본기 | 完顏匡이 襄陽을 공격해 外城을 깸 |
| 1206년 | 송사(宋史) 본기 | 금인이 신마파를 범하자 강릉 부도통 위우량이 포위를 뚫고 양양으로 향함 |
| 1236년 | 원사(元史) 본기 | 양양부가 귀부하자 유현에게 양양·번성을 맡김 |
| 1238년 | 원사(元史) 본기 | 양양 별장 유의가 반란해 유현 등을 잡아 송에 투항, 송이 양양·번성을 되찾음 |
| 1239년 | 속자치통감 | 3월 맹공이 몽골과 세 번 싸워 신양군·번성·양양을 되찾고 이어 광화군도 수복, 식·채도 항복 |
| 1246년 | 속자치통감 | 9월 맹공이 중원 정예 1만5천여 명을 모아 한수 북쪽 번성·신야·당·등 사이에 나눠 주둔시키고(진북군) 양양에 주둔하게 함 |
| 1257년 | 속자치통감 | 정월 몽골 동문울이 광화·조양에 성을 쌓고 군량을 비축해 양양·번성을 함께 공격 — 남으로 한강에 의지하고 북은 호수에 막혀 끝내 건너지 못함 |
| 1268년 | 송사(宋史) 본기 | 대원군이 백하성을 쌓고 양양·번성을 포위하기 시작 |
| 1268년 | 속자치통감 | 11월 경신, 양양의 송군이 산 주변 보루를 공격했으나 아주에게 패해 많은 이가 죽음 |
| 1269년 | 송사(宋史) 본기 | 경호도통 장세걸이 마보·주사를 이끌고 양양·번성을 구원, 적탄포에서 싸움 |
| 1269년 | 속자치통감 | 7월 귀과가 신성으로 향하다 호미주에서 몽골 만호 해여즙의 수군에게 패함 — 한수에 빠져 죽은 군사가 많고 전함 50척이 모두 침몰 (장소 한수·양양 일대로 추정) |
| 1270년 | 원사(元史) 본기 | 양양 포위를 지키려면 수군 훈련과 전함 건조가 급선무라는 건의에 따라 수군 7만여 명을 훈련하고 전함 5천 척을 건조 |
| 1270년 | 원사(元史) 본기 | 송 범문호가 전선 2천 척으로 양양을 구원하러 오자 관자탄에서 맞아 싸워 물리침 |
| 1272년 | 원사(元史) 본기 | 송 양양 장수 장귀가 수송선으로 성을 빠져나와 물길을 따라 돌격하자 불을 밝히고 50리를 추격해 생포 |
| 1273년 | 송사(宋史) 본기 | 가사도가 비로소 양양 수장 여문환이 성을 바치고 대원에 항복했다고 상주 |
| 1273년 | 원사(元史) 본기 | 송 경서안무사·지양양부 여문환이 성을 바치고 항복 |
| 1273년 | 속자치통감 | 2월 경술, 경서안무부사 여문환이 양양을 들어 원에 항복 |
| 1275년 | 마르코 폴로 (Yule 영역) | 사이안푸(양양) — 열두 도시를 거느린 큰 도시; 그 함락 경위를 서술 |
| 1310년 | 원사(元史) 본기 | 양양·협주로·형문주에 큰비, 산이 무너져 관청·민가 2만1829칸이 부서지고 3466명 사망 |
| 1471년 | 명사(明史) 본기 | 荊·襄 유민 반란이 평정되어 140여만이 복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