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일본 · 좌표: 33.513, 130.524 · 사건 46건
| 해 | 사료 | 내용 |
|---|---|---|
| 698년 | 속일본기 | 대재부에 오노(大野)·기이(基肄)·구쿠치(鞠智) 세 성을 수리하게 한다. |
| 718년 | 속일본기 | 대재부가 견당사 다지히노 아가타모리가 돌아왔다고 보고한다. |
| 735년 | 속일본기 | 대재부에 역병 사망자가 많아 신기에 폐백을 바치고 독경, 약, 구휼을 명한다. |
| 740년 | 속일본기 | 대재소이 후지와라 히로쓰구가 상표해 시정의 득실과 천지 재이를 진술하고 승정 현방을 제거할 것을 청한다. |
| 740년 | 속일본기 | 히로쓰구가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자 오노노 아즈마히토를 대장군으로 삼아 5도 군 1만 7천을 징발해 토벌하게 한다. |
| 742년 | 속일본기 | 대재부를 폐지하고 관물을 지쿠젠 국사에게 넘기게 한다. |
| 745년 | 속일본기 | 대재부를 다시 두고 이시카와 가미를 대이로 삼는다. |
| 752년 | 속일본기 | 대재부가 신라 왕자 김태렴과 조공사 김훤 등 700여 인이 배 7척으로 도착했다고 아뢴다. |
| 757년 | 속일본기 | 대재부 사키모리를 반도 제국 병사 대신 서해도 7국 병사 1천으로 충당하게 한다. |
| 759년 | 속일본기 | 신라를 치려는 목적으로 대재부에 행군식을 제정하게 한다. |
| 762년 | 속일본기 | 후지와라 마히카리를 보내 대재부에서 당인 심유악 등을 향응한다. |
| 762년 | 속일본기 | 동해·남해·서해도 절도사용 면습·갑주 각 2만 250구를 대재부에서 만들게 한다(당의 신식). |
| 779년 | 속일본기 | 대재부에 칙: 신라사 김난손 등이 하정 조공을 하러 왔으나 표함 여부 등 입조 연유를 문책하라 한다. |
| 807년 | 일본후기 | 大唐에서 받은 綵幣를 香椎宮에 바치도록 사신을 보냄(遣唐使 귀환의 보답) |
| 811년 | 일본후기 | 大宰府 보고 — 新羅人 金巴兄·金乘弟·金小巴 3인이 쌀 운반 중 해적을 만나 동료가 몰사했다 하며 귀국을 원하여 동선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함. 허락함 |
| 816년 | 일본후기 | 大宰府 보고 — 新羅人 清石珍 등 180인이 귀화함. 때 옷과 노자를 주어 배로 입경시키라 함 |
| 834년 | 속일본후기 | 2월 신라인들이 파도를 건너 大宰府 해안에 정박했으나 백성이 싫어해 활을 쏘아 다치게 함, 太政官이 府司를 문책하고 의료·식량을 주어 돌려보내게 함, 같은 날 遣唐 造舶使·裝束司 임명 |
| 836년 | 속일본후기 | 10월 遣新羅使 紀三津이 大宰府로 돌아옴 |
| 837년 | 속일본후기 | 3월 遣唐大使 藤原常嗣가 鴻臚館을 나서 大宰府로 향함(2차 시도) |
| 837년 | 속일본후기 | 8월 大宰府가 遣唐使 3척이 되돌아온 상황과 上使 등의 상주를 보고 |
| 838년 | 속일본후기 | 3월 遣唐使가 해마다 돌아와 바다를 건너지 못하니 大宰府가 각국에서 정진하는 승려 9명 등을 度해 國分寺·神宮寺에서 사절의 무사를 기원케 함 |
| 838년 | 속일본후기 | 7월 大宰府가 遣唐使 第一·第四舶이 출항했다고 보고 |
| 838년 | 속일본후기 | 7월 大宰府가 遣唐 第二舶이 출항했다고 보고 |
| 839년 | 속일본후기 | 7월 풍파를 견디는 新羅船을 본떠 大宰府에 배를 만들게 함 |
| 839년 | 속일본후기 | 8월 遣唐 錄事 大神宗雄이 大宰府에 牒狀: 입당 3척이 본선을 못 믿어 楚州의 新羅船 9척을 빌려 신라 남쪽 연안을 따라 귀국, 宗雄은 6번선, 나머지는 행방을 모름 |
| 841년 | 속일본후기 | 2월 신라인 張寳高(장보고)가 작년 12월 말안장 등을 바친 것을 「他臣이 함부로 공물을 바침」으로 보아 예로 막아 돌려보내되 수행 물품은 민간 교역을 허락 |
| 842년 | 속일본후기 | 8월 大宰大貳 藤原衛가 4조를 건의, 첫째로 신라인 입경 일체 금지를 청했으나 조정은 표착자에게 식량을 주어 돌려보내고 상인은 교역 뒤 속히 돌려보내도록 답함 |
| 844년 | 속일본후기 | 6월 大宰府가 흰 까마귀 1마리를 바침 |
| 845년 | 속일본후기 | 12월 大宰府 급보: 신라인이 康州 牒 2통을 가지고 본국 표류민 50여 명을 데리고 來著 |
| 848년 | 속일본후기 | 3월 圓仁이 제자 性海·惟正 등과 작년 10월 新羅 商船으로 鎭西府에 도착한 일로 歸朝를 위로하는 中使를 보내고 御被를 내림 |
| 848년 | 속일본후기 | 5월 大宰府가 흰 거북을 바침 |
| 849년 | 속일본후기 | 8월 大宰府 급보: 大唐 상인 53명이 화물을 많이 싣고 배 1척으로 來著 |
| 853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5월 壬寅, 대재부에 조(詔)해 관음사·미륵사와 사왕원·카시이묘·관내 국분사에서 대반야경을 읽게 함 |
| 853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9월 辛丑, 대재부에 곡식 3만8천7백여 석을 내 관내 포창 환자를 진휼하게 함 |
| 855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4월 丙午, 대재부가 역마로 「휴가수 쓰구미네왕이 병을 일으켜 추소사 다구치노 후사토미를 죽이려 했다」고 보고, 관작 박탈 |
| 855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7월 丙寅, 대재부가 입당 유학승 엔사이(圓載)의 상표를 전해 올림 |
| 856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3월 壬子, 대재부가 신라 사람 30명이 표착해 식량을 주어 돌려보냈다고 보고 |
| 858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6월 丁未, 대재부가 5월 1일 큰바람·폭우로 관사가 모두 부서지고 9국2도가 손상됐다고 보고(같은 날 키쿠치성 병고도 불탐) |
| 865년 | 일본삼대실록 | 대재부 보고: 당(唐) 상인 이연효 등 63명이 배 한 척으로 해안에 도착. 홍려관에 안치하고 예에 따라 공급하게 함 |
| 866년 | 일본삼대실록 | 4월 17일 음양료가 '이웃 나라 병사가 엿볼 것'이라 하여 대재부에 경고(警固)를 명하고, 당인이 도성에 마음대로 들어온 것을 부젠·나가토 국사에게 질책 |
| 869년 | 일본삼대실록 | 12월 17일 지난여름 신라 해적의 공물 약탈에 이어 큰 새가 대재부 청사·병고에 모인 괴변. 신기관·음양료가 이웃 나라 병란을 점치자 오기칠도 여러 나라에 폐백을 올리게 함 |
| 869년 | 일본삼대실록 | 12월 28일 우근위소장 사카노우에 다키모리를 대재부에 보내 진호·경고를 맡김. 박다는 이웃 나라 배가 모이는 나루이므로 홍려관 근처에 통령 1인·선사 40인·갑주 40벌을 두자고 상주 |
| 870년 | 일본삼대실록 | 11월 13일 축후 권사생 사에키 마쓰구가 신라국 첩을 바치며, 대재소이 후지와라 모토리마로가 신라왕과 통모해 나라를 해치려 한다고 고발. 사에키를 비위사에 가둠 |
| 880년 | 일본삼대실록 | 서국에서 신라 흉적이 침입한다는 유언이 돌아 좌근위소장 사카노우에 다키모리를 대재소이로 보냈으나 근위들이 폭행하는 등 소란이 일어, 후임 후지와라 후사오는 소란을 이유로 비후수로 옮김 |
| 885년 | 일본삼대실록 | 8월 1일 음양료가 '북쪽 변방과 서쪽 변경에 병적이 있을 것'이라 하여 북륙도 여러 나라와 장문국·대재부에 경고(警固)를 명함 |
| 885년 | 일본삼대실록 | 대당 상고인이 대재부에 도착. 왕신가 사자와 관내 관민이 비싼 값으로 다투어 물건을 사는 것을 금하도록 부사에 명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