鎌倉(相模)

지역: 일본 · 좌표: 35.319, 139.547 · 사건 29건

사건 목록

해사료내용
1180년아즈마카가미10월 6일, 頼朝가 相摸國에 들어갔다. 畠山重忠이 선봉, 常胤이 후방을 맡았고 따르는 군사가 수천만이라 하며, 서둘러 민가를 숙소로 정했다.
1180년아즈마카가미10월 12일, 조상을 높이기 위해 小林郷 북산에 宮廟를 짓고 鶴岡宮(八幡)을 이곳으로 옮겼다. 專光房을 임시 別當으로 삼고 景義가 宮寺 일을 맡았다. 본사는 頼義가 康平 6년 石清水를 勧請한 由比郷의 것이고 義家가 수복했다고 적는다.
1180년아즈마카가미11월 17일, 頼朝가 鎌倉에 돌아왔다. 曾我祐信이 크게 용서받았고 和田義盛이 侍所別當에 임명되었다(石橋合戰 후 安房로 갈 때 이 직을 청해 허락을 받았던 일의 이행).
1180년아즈마카가미12월 20일, 새로 지은 御亭에서 三浦義澄가 垸飯을 바쳤고, 이어 御弓始가 있었다. 미리 정한 것이 아니었으나 橘公長 형제가 활에 뛰어나다는 말이 들려 즉석에서 시험하게 했다고 한다.
1182년아즈마카가미(1182) 2월 14일, 三浦義澄에게 맡겨져 있던 伊東祐親 법사에 대해 御臺所가 임신하셨다는 소문이 돌자 義澄가 틈을 보아 頼朝에게 용서를 청해 사면이 내려졌다. 義澄가 이를 전하자 祐親은 전의 잘못을 부끄러워해 곧 자살했다. 義澄가 달려갔으나 이미 끝난 뒤였다.
1182년아즈마카가미(1182) 8월 12일 유시, 御臺所가 사내아이를 순산했다(후일의 頼家). 驗者는 專光房 良暹·觀修였고, 鳴弦·引目 등은 御家人(上総広常 등)이 맡았으며, 河越重頼의 처(比企尼의 딸)가 불려 와 乳付를 맡았다.
1184년아즈마카가미2월 15일, 範頼·義経의 飛脚이 攝津國에서 鎌倉에 이르러 合戰記錄을 바쳤다. 7일 一谷 합전에서 平家가 대부분 죽고 前內府 宗盛 이하는 바다에 떠 四國으로 향했으며 本三位中將 重衡는 생포되었고, 通盛·忠度·経俊 등을 範頼가, 経正·師盛·教経 등을 義定가, 敦盛·知章 등을 義経이 베었다고 했다.
1184년아즈마카가미4월 8일, 本三位中將 重衡가 伊豆國에서 鎌倉에 와 닿았다. 頼朝는 郭內의 집 한 채를 골라 그를 들이고 狩野介 일족이 밤마다 10인씩 번갈아 지키게 했다.
1184년아즈마카가미4월 21일, 頼朝의 사위 志水冠者는 아버지가 勅勘을 입어 죽었으므로 그 아들도 죽여야 한다는 뜻이 은밀히 정해졌고, 이를 안 女房들이 姫公께 알려 志水가 계략을 쓰고 새벽에 도망쳤다. 女房 차림으로 나가 말을 다른 곳에 두었고 같은 나이의 海野幸氏가 身代로 帳臺 안 이불 밑에 누워 쌍륙을 두는 척했다.
1184년아즈마카가미6월 16일, 一條忠頼가 위세를 믿고 세상을 어지럽힐 뜻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頼朝가 營中에서 그를 죽이기로 했다. 西侍에서 헌배의 자리를 열고 祐経가 銚子를 들었으나 상대가 큰 무장이라 주저했고, 小山田有重이 「이런 杓는 노인의 역」이라며 銚子를 대신 받았고, 天野遠景가 太刀를 들어 忠頼의 왼쪽에서 곧 주살했다. 이어 忠頼의 供人 新平太 등이 난동을 부렸으나 重成·重朝·朝光·遠景 등이 이들을 베었다.
1184년아즈마카가미8월 8일 정오, 參河守 範頼가 平家追討使로 西海를 향해 출발했다. 깃발을 든 사람, 활집을 든 사람이 나란히 앞에 서고, 範頼는 감색 直垂에 밤색 말을 탔으며 北條小四郎·足利義兼·武田有義·千葉常胤·三浦義澄 등 1000여 기가 따랐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월 6일, 西海의 東士들이 배·식량이 끊겨 싸울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아 兵粮米를 배로 보내라고 東國에 명했다. 範頼가 지난해 11월 14일 보낸 飛脚이 이날 도착해 兵粮 부족으로 군사들이 일치하지 않고 절반 이상이 귀국하려 한다 하며 말도 청했다. 頼朝가 雜色 宗光 등에게 상세한 御書를 주어 보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4월 12일, 平氏 멸망 후 西海에서 처리할 조항들을 이날 군의로 논했다. 範頼는 당분간 九州에 머물며 没官領 등을 조사하고, 義経은 생포자들을 데리고 上洛하기로 정했다. 雜色 時沢 등이 飛脚으로 鎭西로 향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5월 16일, 忠清 법사를 六條河原에서 효수했고, 이날 前內府(宗盛)가 鎌倉에 들어와 구경꾼이 담장처럼 늘어섰다. 內府는 수레, 金吾(清宗)는 말을 탔으며 若宮大路를 거쳐 橫大路에 이르러 잠시 멈췄다가 營中의 西對에 거처했다. 밤에 大江廣元이 음식을 올렸으나 먹지 않고 눈물만 삼켰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5월 24일, 義経이 平氏를 멸한 뒤 前內府를 데리고 왔으나 평소의 불의 때문에 頼朝의 노여움을 사 鎌倉에 들어가지 못하고 腰越驛에서 며칠을 보내다, 근심한 끝에 因幡前司 広元을 통해 한 통의 款狀을 올렸다. 広元은 읽었으나 분명한 답은 없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9월 1일, 廷尉 公朝가 勅使로 營中에 와 二品(頼朝)과 대면했다. 술이 권해지고 사금 10량과 말·안장을 받았으며 邦通 편에 長絹 20疋·紺絹 30端이 숙소에도 보내졌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9월 3일 자시, 故 左典厩(義朝)의 유골을 正清의 목과 함께 南御堂 터에 장사지냈다. 길에서는 가마를 썼고 頼朝는 素服을 입고 참석했으며, 義信·頼隆·惟義만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0월 9일, 伊予守 義経을 치는 일을 오래 의논하던 끝에 土佐房 昌俊을 보내기로 했다. 모두 사양하는 가운데 昌俊이 스스로 받아들였고 頼朝는 감격해 老母·어린아이가 있는 下野國 中泉庄을 주었다. 83기를 거느리고 9일 길로 정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0월 24일, 南御堂 이름 勝長壽院의 供養이 행해졌다. 인시에 御家人 중 건장한 이들이 辻辻을 지켰고, 堂 좌우에 假屋을 지어 왼쪽에 二品(頼朝), 오른쪽에 御臺所 등이 청문하는 자리를 두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2월 21일, 諸國 庄園의 下地는 關東이 모두 맡는다고 한다. 예전의 地頭는 대부분 平家 家人이었으나 이는 朝恩이 아니었기에, 平家가 몰락한 뒤 家人이 갖던 자리를 没官하고 옛 領主를 돌려 앉히는 형태였다.
1265년아즈마카가미(1265) 1월 1일, 日蝕이었으나 어젯밤부터 비가 와 보이지 않았다. 御所를 싸 가리지 않았고 左典厩(時宗)가 垸飯을 맡았다. 御簾를 내리고 土御門大納言이 모셨으며 御劍은 越後守 實時, 御調度는 越前々司 時廣 등이 맡았다.
1265년아즈마카가미(1265) 3월 9일 해시, 큰 지진이 있었다. 이날 밤 鶴岡若宮 보전 앞에서 管弦講이 행해지고 別当僧正이 式을 읽는 八幡講이 있었으며 이어 御神樂이 있었다.
1265년아즈마카가미(1265) 6월 10일, 종일 큰 비가 와 龜谷과 泉谷의 여러 산이 무너졌다. 사람과 말이 흙에 눌려 죽은 이가 많았고 흙 속에서 파낸 사람 중 한두 사람만 목숨을 건졌다.
1265년아즈마카가미(1265) 6월 11일, 評定衆에 前越前守 平時廣, 中務權大輔 平教時, 宮內權大輔 大江時秀가 새로 더해졌고, 引付衆에도 새 사람들이 더해졌다. 壹岐五郎左衛門尉 爲忠이 사퇴한 자리를 메운 것이라 한다.
1265년아즈마카가미(1265) 7월 4일 미시, 山内 御山庄에서 侍 두 사람이 싸움을 일으켜 서로 죽었다. 이 때문에 鎌倉 안이 술렁였고 御家人들이 달려왔다.
1265년아즈마카가미(1265) 12월 14일 새벽, 彗星이 동쪽에 나타났다. 掃部助 範元이 가장 먼저 御所에 알렸고 이어 晴茂 등이 彗星이라 보고하며 勘文을 올렸다.
1266년아즈마카가미(1266) 6월 23일 유시, 御息所와 姫宮이 갑자기 山内殿으로 옮겼고 若宮은 相州(時宗) 저택에 들었다. 사람들이 몰려갔고 鎌倉 안이 이유를 모른 채 소란스러웠다.
1266년아즈마카가미(1266) 7월 1일, 御家人들이 관(關)을 깨고 달려오거나 길을 돌아 몰래 모여 무기를 갖고 민가에 숨었다. 유시에 갑자기 소동이 일어 모인 무리가 활을 들었으나 아무 일 없이 저물었다.
1266년아즈마카가미(1266) 7월 4일 오시, 中務權大輔 教時가 갑옷 입은 군병 수십 기를 거느리고 藥師堂谷 저택에서 塔辻 숙소로 나가 이웃이 크게 술렁였다. 相州(時宗)가 東郷八郎入道를 보내 중서(教時)의 행렬을 막게 했다. 술시에 将軍家가 越後入道 勝圓의 佐介亭에 들어갔는데, 귀경의 出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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