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일본 · 좌표: 35.021, 135.756 · 사건 144건
| 해 | 사료 | 내용 |
|---|---|---|
| 793년 | 일본후기 | 大納言 藤原小黒麻呂·左大弁 紀古佐美 등을 보내 山背国 葛野郡 宇太村 땅을 살피게 함 — 천도를 위함(新宮 조영 시작) |
| 793년 | 일본후기 | 參議 壱志濃王 등을 보내 賀茂大神에게 천도를 고함 |
| 793년 | 일본후기 | 5위 이상·諸司 主典 이상에게 役夫를 내게 하여 새 서울의 宮城을 쌓게 함 |
| 793년 | 일본후기 | 菅野真道·藤原葛野麻呂 등을 보내 새 서울의 택지를 나누어 줌 |
| 794년 | 일본후기 | 詔로 山背国을 山城国으로 고치고 새 서울을 平安京이라 부름(近江 古津은 大津으로 개칭). 평안경 정도 |
| 796년 | 일본후기 | 渤海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왕이 선왕 서거를 알리는 啓를 올림 |
| 797년 | 일본후기 | 지진과 폭풍 — 좌우 京 坊門과 민가가 많이 쓰러짐 |
| 798년 | 일본후기 | 귀화한 唐人 嵩山忌寸道光 등이 가난하니 형편에 따라 벼를 하사하라고 명함 |
| 799년 | 일본후기 | 豊楽院이 덜 되어 대극전 앞에 임시 전각을 꾸려 천황이 임어하고 渤海使 大昌泰 등과 연회함 |
| 804년 | 일본후기 | 폭우와 큰바람 — 중원 서쪽 누각이 넘어지고 神泉苑 좌우 누각이 허물어짐. 천황이 「짐에게 불리한가」 탄식함 |
| 805년 | 일본후기 | 入唐求法僧 最澄을 전각으로 불러 悔過讀經을 하게 함. 最澄이 唐나라 불상을 바침 |
| 806년 | 일본후기 | 山城国 葛野郡 宇太野를 山陵 터로 삼음. 상을 입어 백관이 소복을 입음. 서북쪽 두 산에 불이 일어남 |
| 806년 | 일본후기 | 桓武天皇을 山城国 紀伊郡 柏原山陵에 장사함(諱 山部, 天宗高紹天皇의 장자. 前史가 빠져 일생을 기록) |
| 806년 | 일본후기 | 平城天皇이 大極殿에서 즉위하고 大同으로 개원함 — 사관은 즉위 다음 해를 넘기지 않은 개원은 예에 어긋난다고 평함 |
| 807년 | 일본후기 | 蔭子 藤原宗成가 中務卿 伊予親王에게 불궤를 부추기자, 大納言 藤原雄友가 듣고 右大臣 내마려에게 알림. 親王이 먼저 宗成의 사주를 아뢰어 宗成이 左近府에 갇힘(伊予親王 사건의 발단) |
| 808년 | 일본후기 | 疫癘로 사망자가 많아 경중 해골을 거두어 묻고, 諸大寺·畿内七道 諸国에서 大般若経을 읽게 하며 병자에게 쌀·소금을 줌 |
| 808년 | 일본후기 | 疫病 때문에 말 활쏘기를 멈춤. 大同元年 홍수 피해와 작년 이래 疫病 유행으로 쓰러진 자가 많아 피해 7분 이상 호의 미납 正税를 면제함 |
| 809년 | 일본후기 | 平城天皇이 풍병으로 정사를 돌보기 어려워 皇大弟에게 양위한다는 詔를 내림 |
| 809년 | 일본후기 | 皇太弟(嵯峨天皇)가 禅位를 받아 大極殿에서 즉위함 |
| 810년 | 일본후기 | 渤海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王이 先帝(桓武) 붕어와 天皇 즉위를 위로·경하하는 啓를 올림 |
| 811년 | 일본후기 | 渤海使 高南容이 돌아감 —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려 선린을 칭찬하고 선박을 바꾸어 副使가 호송하게 함 |
| 811년 | 일본후기 | 大納言 坂上田村麻呂가 粟田 별업에서 향년 54세로 薨 — 延暦23年 征夷大将軍에 올라 공을 세웠다고 기록 |
| 812년 | 일본후기 | 神泉苑에 행행하여 꽃을 구경하며 문인에게 시를 짓게 함 — 花宴의 시작 |
| 815년 | 일본후기 | 5위 이상과 渤海使를 불러 연회하고 女樂을 연주함 |
| 816년 | 일본후기 | 渤海副使 高景秀 이하에게 여름옷을 주고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림 — 작년 孝廉 귀로에 배가 부서지고 孝廉이 병으로 죽은 일을 알림 |
| 816년 | 일본후기 | 밤의 큰바람이 羅城門을 쓰러뜨림. 경중과 여러 나라도 피해가 큼 |
| 819년 | 일본후기 | 大唐 越州人 周光輪·言升則 등이 新羅人 배를 타고 와 唐 소식을 묻자, 元和 11년 圓州 節度使 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켜 50만 병을 거느렸고 天子가 諸道 병을 보내 토벌하나 이기지 못했다고 답함 |
| 819년 | 일본후기 | 渤海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王 仁秀의 啓 |
| 820년 | 일본후기 |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림 — 앞 사신 感徳 등이 선박이 표류해 올 수 없어 배 한 척을 특별히 내려 보냈음을 적음 |
| 822년 | 일본후기 | 豊楽殿에서 5위 이상과 蕃客을 연회함 — 渤海使 王文矩 등이 打毬를 하고 상으로 綿 200屯을 걺 |
| 823년 | 일본후기 | 嵯峨天皇이 冷然院으로 옮겨 皇太子에게 양위하겠다고 藤原冬嗣에게 말함. 冬嗣가 일제이태상황의 부담을 들어 만류하나 천황이 뜻을 굽히지 않음 |
| 823년 | 일본후기 | 淳和天皇이 東宮에서 내리(內裏)로 옮기고, 先立 常世王이 固辞하여 正良親王을 皇太子로 세움 |
| 824년 | 일본후기 | 詔로 弘仁15年을 天長元年으로 개원함 |
| 824년 | 일본후기 | 平城太上天皇을 楊柳陵에 장사함 — 사관은 도량이 깊으나 시기심이 많고 嗣位 초에 형제와 그 모자를 처벌한 일이 지나친 형벌이라 평함 |
| 827년 | 일본후기 | 가뭄 때문에 少僧都 空海가 佛舎利를 內裏에 청해 예배·관욕하자 비가 내림 |
| 828년 | 일본후기 | 큰비로 경중 길이 넘치고 하천이 터지며 산이 무너져 사람과 물건이 많이 떠내려감. 좌우 京에 진휼 사자를 보냄 |
| 829년 | 일본후기 | 勅 — 諸国에 疫癘가 번져 백성이 일찍 죽으니 출가의 공덕으로 僧 100인을 득도시켜 재앙을 막게 함 |
| 831년 | 일본후기 | 지진(同日 無品 基良親王 薨, 大僧都 空海 上表 기사가 이어짐) |
| 832년 | 일본후기 | 勅 — 작년 가을 흉작으로 諸国이 굶주리고 올해 疫旱이 이어지며 화재까지 나니 畿内七道 諸国에서 7일간 経王을 轉讀하게 함 |
| 833년 | 일본후기 | 淳和天皇이 譲位를 위해 西院으로 遷御. 같은 날 巳刻 큰 지진(이어 皇太子에게 양위) |
| 833년 | 속일본후기 | 2월 상황 淳和가 淳和院에서 황태자 正良親王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내림 |
| 833년 | 속일본후기 | 3월 仁明 천황이 大極殿에서 즉위, 즉위 조서를 내림 |
| 833년 | 속일본후기 | 4월 귀화한 신라인 金礼眞 등 남녀 10명을 左京 五條에 호적 편입 |
| 834년 | 속일본후기 | 5월 藤原常嗣를 遣唐大使로 두고 備中權守를 겸하게 하고 三嶋嶋繼를 造舶次官으로 임명 |
| 834년 | 속일본후기 | 12월 지난 天長 연간에 편찬한 令義解를 시행한다는 조서 |
| 835년 | 속일본후기 | 2월 長岑高名을 遣唐 准判官, 松川貞嗣를 錄事, 譯語들을 임명 |
| 836년 | 속일본후기 | 2월 遣唐使를 위해 北野에서 천신지기에 제사 지내고 정무를 쉼 |
| 836년 | 속일본후기 | 9월 遣唐 대사·부사 등이 大宰府에서 입경하여 節刀를 반납(첫 항해 실패) |
| 837년 | 속일본후기 | 12월 새벽부터 밤까지 큰바람, 京中 집들이 곳곳에서 파손 |
| 840년 | 속일본후기 | 5월 후태상천황(淳和)이 淳和院에서 崩, 近江·伊勢·美濃 三關을 굳게 지키게 함 |
| 840년 | 속일본후기 | 6월 유배되었던 小野篁이 입경, 황색 옷을 입고 절하며 사례 |
| 841년 | 속일본후기 | 9월 홍수로 백성 집이 떠내려가고 京中 다리와 山埼橋가 모두 끊김 |
| 842년 | 속일본후기 | 3월 渤海 客徒 賀福延 등이 河陽을 떠나 입경, 鴻臚館에 안치 |
| 842년 | 속일본후기 | 4월 渤海使 賀福延 등이 八省院에서 啓函과 信物을 바침 |
| 842년 | 속일본후기 | 7월 嵯峨 태상천황이 嵯峨院에서 崩(향년 57), 遺詔로 薄葬 |
| 842년 | 속일본후기 | 7월 承和의 變: 春宮坊 帶刀舍人 伴健岑이 橘逸勢와 합력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 하여 황태자(恒貞)를 폐하고 연루자를 유죄 처분 |
| 842년 | 속일본후기 | 8월 道康親王을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서 |
| 842년 | 속일본후기 | 8월 參議 正躬王이 廢太子를 淳和院으로 보냄 |
| 844년 | 속일본후기 | 7월 源常을 左大臣, 橘氏公을 右大臣에 임명, 같은 날 在唐 천태 請益僧 圓仁과 留學僧 圓載에게 황금 200小兩을 仁好 편에 보내게 함 |
| 845년 | 속일본후기 | 3월 仁壽殿 동쪽 廂에 불이 났으나 사람들이 꺼서 진화 |
| 849년 | 속일본후기 | 4월 領客使가 渤海使 王文矩 등을 입경시켜 鴻臚館에 안치, 宣命으로 12년 1회 조공 기한을 어긴 것을 용서 |
| 850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3월 己亥, 仁明천황이 청량전에서 붕어 — 황태자 도코(문덕)가 신새·보검 등을 받고 동궁 아원으로 옮김 |
| 850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3월 癸卯, 유조에 따라 검약하게 후카쿠사 산릉에 인명황제를 장사지냄 |
| 850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3월 乙巳, 사가 산릉에 폭풍·뇌우로 나무가 쓰러져 중납언 아베노 야스히토를 보내 살피게 함 |
| 850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5월 辛巳, 사가 태황태후 다치바나노 가치코 붕어(다음 날 深谷山에 박장) |
| 850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4월 甲子, 문덕천황이 대극전에서 즉위 (앞날 癸亥에 후카쿠사 산릉에 즉위를 고함) |
| 850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7월 己亥, 큰비로 대극전 앞 용미도 12장이 물에 무너짐 |
| 850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11월 戊戌, 고레히토 친왕(뒷날 청화천황)을 황태자로 세움 |
| 850년 | 속일본후기 | 1월 도적 떼가 방화·약탈을 일삼아 左右京職과 기내 國司에게 수색하라는 勅 |
| 850년 | 속일본후기 | 2월 병이 위중해 황태자와 대신들을 침상 아래로 불러 유제를 받게 하고 매·개를 풀어 줌 |
| 850년 | 속일본후기 | 3월 仁明 천황이 清凉殿에서 崩, 璽·寶劍 등을 황태자 直曹로 모심 |
| 851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2월 丙辰, 선황이 쉬던 청량전을 옮겨 가쇼지 불당으로 삼음(今上이 차마 쓰지 못해서) |
| 851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4월 庚午, 개원 인주(仁壽) — 즉위 첫해 흰 거북·감로 상서를 이유로 연호를 바꿈 |
| 851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8월 甲寅, 수해를 입은 경사(京師) 사람에게 검비위사를 보내 곡식을 지급(앞서 己酉 큰비) |
| 851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8월 乙丑, 이세 재내친왕이 가모강에서 계(禊)하고 같은 날 노노미야(野宮)에 들어감 — 대상제 준비 |
| 851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10월 甲子, 천황이 가모강에 행차해 대상제 앞 계사(禊事)를 크게 거행 |
| 851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11월 辛卯, 대상제로 팔성원에서 제사, 이어 풍락원에서 연회 |
| 852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2월 丁巳 저녁, 서쪽 하늘에 길이 5장쯤 되는 혜성이 나타남(관측지는 경사로 추정) |
| 852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윤8월 己卯, 앞서 乙亥의 큰바람(집이 날고 나무가 뽑힘) 피해 입은 경사 사람에게 늠원 쌀을 나눠줌 |
| 853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2월, 경사와 기외에 포창(천연두류)이 퍼져 사망자가 많음 — 덴표 9년·고닌 5년 이후 세 번째 |
| 853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4월 乙酉, 포창이 퍼져 백성이 죽어 가모제를 정지, 사자를 보내 사정을 아룀 |
| 853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8월, 서경(西京)에 불이 나 180여 집으로 번짐 |
| 854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7월 乙巳, 비젠국이 곡식을 끊은 우바새 한 명을 바침 — 신천원에 두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인이라 부름 |
| 855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2월, 동북쪽에 긴 별(혜성)이 나타남(관측지는 경사로 추정) |
| 855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2월 丁卯, 우대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등에게 국사(續日本後紀)를 편수하라고 조(詔)함 |
| 856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3월 戊午, 강가에 있어 물에 깎이는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쓰키요미사를 마쓰오 남쪽 산으로 옮김 |
| 856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3월, 지진이 자주 일어 경사와 성 남쪽에서 집이 무너지거나 불탑이 기움 |
| 857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1월, 역박사 오오카스가노 마노마로가 대연력이 당 달력과 어긋난다며 오기력(五紀曆)으로 새 달력을 만들겠다 주청, 허락 |
| 857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2월 丁亥,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를 태정대신, 겐노 마코토를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시미를 우대신으로 임명 |
| 857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2월 己丑, 미마사카의 흰 사슴·히타치의 연리지 상서를 이유로 천안(天安)으로 개원 |
| 857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3월 癸丑, 경 남쪽의 무리 도적을 잡으려 좌우 근위·병위·검비위사를 보냄 |
| 857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5월 乙丑 말, 장마가 개지 않고 홍수가 넘쳐 길·다리가 끊기고 둑이 터짐(5월 丙辰에도 경중 물이 넘침) |
| 858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4월 庚子, 이달 壬辰부터 己亥까지 이어진 비가 처음 갬(5월 壬午 대홍수 전의 장마) |
| 858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5월 壬午, 큰비에 홍수가 넘쳐 동굴천 물이 냉연원에 들고 좌우경이 수해를 입어 익사자가 많음 |
| 858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8월 乙卯, 문덕천황이 신성전에서 붕어(앞서 辛亥 밤 갑자기 병이 들었고 壬子 병이 깊어 말을 못함) |
| 858년 | 일본문덕천황실록 | 9월 甲子, 밤에 대행황제를 다무라(田邑) 산릉에 장사지냄 — 앞서 庚申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다무라향 마하라 언덕을 산릉터로 정함 |
| 858년 | 일본삼대실록 | 문덕천황이 8월 27일 냉연원 신성전에서 붕어. 근위 장수들이 황태자 숙소를 지키고 신새·보검 등을 황태자에게 넘김 |
| 858년 | 일본삼대실록 | 11월 7일 청화천황(9세)이 대극전에서 즉위하고 조(詔)를 선포함 |
| 860년 | 일본삼대실록 | 비바람이 그치지 않아 도성 동서 두 하천이 범람해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고, 해안 여러 나라에서 조수가 넘쳐 사람·가축 피해 |
| 863년 | 일본삼대실록 | 5월 20일 신천원에서 어령회를 엶. 숭도천황·이예친왕 등 억울하게 죽은 어령을 달래는 법회로, 동원(苑)의 4문을 열어 도성 사람이 구경하게 함 |
| 866년 | 일본삼대실록 | 윤3월 22일 응천문 화재 때문에 백관을 회창문 앞에 모음. 숭복사 승려 20명에게 대반야경을 7일간 읽게 하고, 범석사 승려 10명에게 사천왕비법을 7일간 닦게 하여 재변을 없애려 함. (응천문과 동서 누관은 윤3월 10일 밤 소실) |
| 866년 | 일본삼대실록 | 8월 3일 좌경 사람 대택응취가 대납언 반선남과 우위문좌 반중용이 공모해 응천문에 불을 질렀다고 고발(응천문의 변) |
| 866년 | 일본삼대실록 | 8월 19일 칙으로 태정대신(후지와라 요시후사)에게 천하의 정치를 대행하도록 함(섭정의 시작) |
| 867년 | 일본삼대실록 | 이 해 안팎이 궁핍해 백성이 굶주리고 특히 기내가 심함. 도적이 무리 지어 길을 막고 약탈·방화하므로 국사에게 오가작통(보)을 맺어 감찰하게 함 |
| 869년 | 일본삼대실록 | 2월 1일 천황이 임헌하여 정명친왕(후의 양성천황)을 황태자로 세우고 책문을 읽음 |
| 869년 | 일본삼대실록 | 4월 13일 정관격(貞觀格) 편찬을 마치고 대납언 후지와라 우지무네 등이 궐에 바침 |
| 871년 | 일본삼대실록 | 윤8월 7일 천둥과 큰비로 강이 갑자기 넘쳐 도성의 길·다리가 휩쓸리고 집이 무너짐. 사자를 보내 신사에 폐백을 올려 비를 멈추게 빎 |
| 871년 | 일본삼대실록 | 9월 28일 태황태후 후지와라 준시(문덕천황의 어머니)가 붕어 |
| 871년 | 일본삼대실록 | 12월 14일 음양료가 내년에 천행(역병)이 있을 것이라 하고, 노인도 겨울 꽃이 핀 해는 천하 대역병이라 하여 오기칠도 여러 나라에 폐백·전경을 명함 |
| 872년 | 일본삼대실록 | 5월 24일 발해 대사 양성규가 사사로운 선물을 천황·황태자에게 바치기를 청해 허락됨. 같은 날 칙으로 곡연을 베풀고 어의를 내림(발해 사신 접대) |
| 872년 | 일본삼대실록 | 9월 2일 태정대신 후지와라 요시후사가 동일조제에서 69세로 사망 |
| 875년 | 일본삼대실록 | 1월 28일 밤 냉연원 화재로 건물 54동이 타고 비각(秘閣) 소장 도서·문서가 재가 됨 |
| 875년 | 일본삼대실록 | 4월 28일 묘시에 동북쪽에 붉은 빛 혜성(원문 「白彗…其色赤」)이 나타나 광망이 생기고, 5월 2일에는 길이 1장 남짓. 같은 4월 28일 천황이 처음 사기를 읽기 시작 |
| 876년 | 일본삼대실록 | 4월 11일 전 단파수 안배방상·가사 홍흥을 불놓았다는 혐의로 추금(대극전 화재의 조사) |
| 876년 | 일본삼대실록 | 11월 29일 천황(청화)이 황태자(양성)에게 양위하고, 우대신 후지와라 모토쓰네에게 어린 군주를 보필해 정치를 대행하게 함 |
| 877년 | 일본삼대실록 | 1월 3일 양성천황이 대극전이 아직 없어 풍락전에서 즉위하고 조(詔)를 선포 |
| 877년 | 일본삼대실록 | 4월 9일 사시에 대극전 재건을 시작. 비탄 목수 등과 친왕·공경이 팔성원에서 행사 대부와 공인을 대접 |
| 879년 | 일본삼대실록 | 10월 8일 대극전 낙성. 우대신이 조당원 함장당에서 낙성연(釁落)을 열고 작사에 참여한 사위 이하 공인과 비탄 목수까지 대접 |
| 880년 | 일본삼대실록 | 12월 5일 태상천황(청화)이 붕어했음을 내외에 알림. 유조로 거애를 하지 않고 심상하라 하며 제위(諸衛)를 엄중히 경계시키고 관(關)을 닫음 |
| 880년 | 일본삼대실록 | 12월 6일 자시 큰 지진, 밤부터 아침까지 16번. 대극전 서북 모퉁이 돌단이 갈라지고 궁성 담과 도성 집들이 많이 무너짐 |
| 883년 | 일본삼대실록 | 5월 2일 발해 대사 배정이 조당에서 왕계와 신물을 바침. 3일 풍락전에서 사연 |
| 884년 | 일본삼대실록 | 2월 4일 양성천황이 몸이 아프다며 태정대신에게 손위(遜位)를 청하는 친필을 보내고 이조원으로 옮겨 양위 |
| 884년 | 일본삼대실록 | 2월 23일 광효천황이 대극전에서 즉위하고 조(詔)를 선포 |
| 884년 | 일본삼대실록 | 3월 15일 밤 큰 천둥·비로 상주사 탑에 벼락이 쳐 5층에서 불이 나 강당·금당·종루·경장·보랑·중문이 순식간에 전소 |
| 886년 | 일본삼대실록 | 7월 7일 5월부터의 장마 끝에 큰 비바람과 홍수. 가모·송미 등 6사에 사자를 보내 폐백을 올려 비를 멈추도록 빎 |
| 887년 | 일본삼대실록 | 7월 30일 신시 큰 지진이 수 시각 계속. 천황이 인수전에서 자신전 남쪽 뜰로 피신. 도성과 오기칠도에 큰 피해, 바다 조수가 육지로 올라와 익사자가 많고 섭진국이 가장 심함(仁和 지진) |
| 887년 | 일본삼대실록 | 8월 20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큰 비바람으로 나무가 뽑히고 집이 쓰러져 압사자가 많음. 가모강·가도노강이 범람해 인마가 다닐 수 없음 |
| 887년 | 일본삼대실록 | 8월 26일 천황이 병이 중해 제7황자(후의 우다천황)를 황태자로 세우고, 같은 날 사시에 인수전에서 58세로 붕어 |
| 1180년 | 아즈마카가미 | 4월 9일, 源頼政가 平清盛 토벌을 오래 꾀해 오다가 이날 밤 아들 仲綱 등과 以仁王의 三条高倉御所에 몰래 찾아가 源頼朝 등 源氏를 모아 平氏를 치라고 권했고, 令旨를 내리게 했다. 마침 서울에 있던 陸奥十郎義盛(行家)가 令旨를 들고 東國으로 향하게 했다. |
| 1181년 | 아즈마카가미 | 윤2월 4일 술시, 入道 平相國(清盛)이 九條河原口 盛国의 집에서 죽었다. 지난달 25일부터 병이 들어 유언하기를 3일 후 장례하고 유골은 播磨國 山田 法花堂에 넣되, 자손은 오직 東國 귀복을 꾀하라 했다. |
| 1181년 | 아즈마카가미 | 8월 13일, 藤原秀衡에게 頼朝를, 平資長에게 木曾義仲를 追討하라는 宣下가 있었다. 平氏의 신청에 따른 것이다. |
| 1184년 | 아즈마카가미 | (1184) 1월 20일, 範頼와 義経이 頼朝의 使로 수만 기를 이끌고 義仲를 치러 入洛했다. 範頼는 勢多로, 義経은 宇治路로 들어와 義仲 군이 두 길에서 막았으나 모두 패했다. 義仲는 近江國 粟津 부근에서 相摸 住人 石田次郎에게 목 베였다. |
| 1184년 | 아즈마카가미 | 1월 26일, 検非違使들이 七條河原에서 義仲와 忠直·兼平·行親 등의 목을 받아 獄門 앞 나무에 걸었다. 또 囚人 樋口兼光도 데리고 돌았다. |
| 1184년 | 아즈마카가미 | 1월 29일, 關東 두 장군(範頼·義経)이 平氏 정벌을 위해 군병을 이끌고 이날 京을 떠나 西國으로 향했다. |
| 1184년 | 아즈마카가미 | 2월 14일, 右衛門権佐 定長이 勅定으로 本三位中將 重衡를 심문하러 故 中御門中納言 家成卿의 八條堀川堂에 갔다. 土肥実平이 같은 수레로 重衡를 데려와 弘庇에서 신문하고 구술 조항을 기록해 올렸다. |
| 1184년 | 아즈마카가미 | 3월 10일, 本三位中將 重衡가 이날 京을 나와 關東으로 향했다. 梶原景時이 호송했으며 頼朝가 청한 것이다. |
| 1184년 | 아즈마카가미 | 8월 26일, 義経의 飛脚이 도착해 10일 信兼의 아들 兼衡·信衡·兼時 등을 宿廬로 불러 죽였고, 11일 信兼에게 解官 宣旨가 내렸다고 알렸다. |
| 1184년 | 아즈마카가미 | 9월 12일, 參河守 範頼의 사자가 와서 올린 글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入洛, 29일 追討使 官符를 받아 9월 1일 西海로 출발했다고 한다. |
| 1185년 | 아즈마카가미 | (1185) 4월 4일, 平家가 모두 토멸되었다는 보고를 어젯밤 義経의 사자가 京都에 알렸고, 오늘 源弘綱이 죽은 자·생포자의 명단을 仙洞(후白河)에 올렸다. |
| 1185년 | 아즈마카가미 | (1185) 8월 29일, 16일 小除目 聞書가 이날 도착해 源氏가 대부분 朝恩을 입었다. 義範이 伊豆守, 惟義가 相摸守, 義兼가 上總介, 義経이 伊予守 등이다. 義経 관직은 4월경 泰経에게 은밀히 부탁해 둔 것으로, 불의가 드러났으나 勅定에 맡기게 됐고 이들 國은 當時 關東御分國이 되었다. |
| 1185년 | 아즈마카가미 | (1185) 10월 17일, 土佐房昌俊이 60여 기를 거느리고 伊予大夫判官 義経의 六條室町亭을 습격했다. 義経 쪽은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佐藤忠信 등과 문을 열고 달려나가 싸웠고 行家도 뒤에서 가세해 昌俊이 물러났다. 義経은 곧 仙洞에 달려가 무사함을 아뢰었다. |
| 1185년 | 아즈마카가미 | (1185) 11월 25일, 北條時政이 入洛했다는 소문이다. 行家·義経의 반역에 頼朝가 분개한 사정을 師中納言이 아뢰었고, 이날 반드시 찾아내라는 宣下가 내려졌다. |
| 1185년 | 아즈마카가미 | (1185) 11월 26일, 大蔵卿 泰経가 칩거했다. 義経의 追討 宣旨를 청한 것을 전한 이가 泰経이었기에 頼朝가 몹시 분개해 그 뜻이 천聽에 닿아 勅定이 내려진 결과라 한다. 泰経가 行家·義経 모반에 동조한 글을 대나무 가지에 끼워 師中納言의 뜰에 세웠다. |
| 1185년 | 아즈마카가미 | (1185) 11월 28일, 諸國에 일률로 守護·地頭를 보임하고, 權門勢家의 庄公을 가리지 않고 段別 5升의 兵粮米를 부과하는 일을 이날 밤 北條時政이 藤中納言 經房卿에게 아뢰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