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都(三条高倉御所)

지역: 일본 · 좌표: 35.021, 135.756 · 사건 144건

사건 목록

해사료내용
793년일본후기大納言 藤原小黒麻呂·左大弁 紀古佐美 등을 보내 山背国 葛野郡 宇太村 땅을 살피게 함 — 천도를 위함(新宮 조영 시작)
793년일본후기參議 壱志濃王 등을 보내 賀茂大神에게 천도를 고함
793년일본후기5위 이상·諸司 主典 이상에게 役夫를 내게 하여 새 서울의 宮城을 쌓게 함
793년일본후기菅野真道·藤原葛野麻呂 등을 보내 새 서울의 택지를 나누어 줌
794년일본후기詔로 山背国을 山城国으로 고치고 새 서울을 平安京이라 부름(近江 古津은 大津으로 개칭). 평안경 정도
796년일본후기渤海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왕이 선왕 서거를 알리는 啓를 올림
797년일본후기지진과 폭풍 — 좌우 京 坊門과 민가가 많이 쓰러짐
798년일본후기귀화한 唐人 嵩山忌寸道光 등이 가난하니 형편에 따라 벼를 하사하라고 명함
799년일본후기豊楽院이 덜 되어 대극전 앞에 임시 전각을 꾸려 천황이 임어하고 渤海使 大昌泰 등과 연회함
804년일본후기폭우와 큰바람 — 중원 서쪽 누각이 넘어지고 神泉苑 좌우 누각이 허물어짐. 천황이 「짐에게 불리한가」 탄식함
805년일본후기入唐求法僧 最澄을 전각으로 불러 悔過讀經을 하게 함. 最澄이 唐나라 불상을 바침
806년일본후기山城国 葛野郡 宇太野를 山陵 터로 삼음. 상을 입어 백관이 소복을 입음. 서북쪽 두 산에 불이 일어남
806년일본후기桓武天皇을 山城国 紀伊郡 柏原山陵에 장사함(諱 山部, 天宗高紹天皇의 장자. 前史가 빠져 일생을 기록)
806년일본후기平城天皇이 大極殿에서 즉위하고 大同으로 개원함 — 사관은 즉위 다음 해를 넘기지 않은 개원은 예에 어긋난다고 평함
807년일본후기蔭子 藤原宗成가 中務卿 伊予親王에게 불궤를 부추기자, 大納言 藤原雄友가 듣고 右大臣 내마려에게 알림. 親王이 먼저 宗成의 사주를 아뢰어 宗成이 左近府에 갇힘(伊予親王 사건의 발단)
808년일본후기疫癘로 사망자가 많아 경중 해골을 거두어 묻고, 諸大寺·畿内七道 諸国에서 大般若経을 읽게 하며 병자에게 쌀·소금을 줌
808년일본후기疫病 때문에 말 활쏘기를 멈춤. 大同元年 홍수 피해와 작년 이래 疫病 유행으로 쓰러진 자가 많아 피해 7분 이상 호의 미납 正税를 면제함
809년일본후기平城天皇이 풍병으로 정사를 돌보기 어려워 皇大弟에게 양위한다는 詔를 내림
809년일본후기皇太弟(嵯峨天皇)가 禅位를 받아 大極殿에서 즉위함
810년일본후기渤海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王이 先帝(桓武) 붕어와 天皇 즉위를 위로·경하하는 啓를 올림
811년일본후기渤海使 高南容이 돌아감 —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려 선린을 칭찬하고 선박을 바꾸어 副使가 호송하게 함
811년일본후기大納言 坂上田村麻呂가 粟田 별업에서 향년 54세로 薨 — 延暦23年 征夷大将軍에 올라 공을 세웠다고 기록
812년일본후기神泉苑에 행행하여 꽃을 구경하며 문인에게 시를 짓게 함 — 花宴의 시작
815년일본후기5위 이상과 渤海使를 불러 연회하고 女樂을 연주함
816년일본후기渤海副使 高景秀 이하에게 여름옷을 주고 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림 — 작년 孝廉 귀로에 배가 부서지고 孝廉이 병으로 죽은 일을 알림
816년일본후기밤의 큰바람이 羅城門을 쓰러뜨림. 경중과 여러 나라도 피해가 큼
819년일본후기大唐 越州人 周光輪·言升則 등이 新羅人 배를 타고 와 唐 소식을 묻자, 元和 11년 圓州 節度使 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켜 50만 병을 거느렸고 天子가 諸道 병을 보내 토벌하나 이기지 못했다고 답함
819년일본후기渤海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침 — 王 仁秀의 啓
820년일본후기渤海王에게 보내는 書를 내림 — 앞 사신 感徳 등이 선박이 표류해 올 수 없어 배 한 척을 특별히 내려 보냈음을 적음
822년일본후기豊楽殿에서 5위 이상과 蕃客을 연회함 — 渤海使 王文矩 등이 打毬를 하고 상으로 綿 200屯을 걺
823년일본후기嵯峨天皇이 冷然院으로 옮겨 皇太子에게 양위하겠다고 藤原冬嗣에게 말함. 冬嗣가 일제이태상황의 부담을 들어 만류하나 천황이 뜻을 굽히지 않음
823년일본후기淳和天皇이 東宮에서 내리(內裏)로 옮기고, 先立 常世王이 固辞하여 正良親王을 皇太子로 세움
824년일본후기詔로 弘仁15年을 天長元年으로 개원함
824년일본후기平城太上天皇을 楊柳陵에 장사함 — 사관은 도량이 깊으나 시기심이 많고 嗣位 초에 형제와 그 모자를 처벌한 일이 지나친 형벌이라 평함
827년일본후기가뭄 때문에 少僧都 空海가 佛舎利를 內裏에 청해 예배·관욕하자 비가 내림
828년일본후기큰비로 경중 길이 넘치고 하천이 터지며 산이 무너져 사람과 물건이 많이 떠내려감. 좌우 京에 진휼 사자를 보냄
829년일본후기勅 — 諸国에 疫癘가 번져 백성이 일찍 죽으니 출가의 공덕으로 僧 100인을 득도시켜 재앙을 막게 함
831년일본후기지진(同日 無品 基良親王 薨, 大僧都 空海 上表 기사가 이어짐)
832년일본후기勅 — 작년 가을 흉작으로 諸国이 굶주리고 올해 疫旱이 이어지며 화재까지 나니 畿内七道 諸国에서 7일간 経王을 轉讀하게 함
833년일본후기淳和天皇이 譲位를 위해 西院으로 遷御. 같은 날 巳刻 큰 지진(이어 皇太子에게 양위)
833년속일본후기2월 상황 淳和가 淳和院에서 황태자 正良親王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내림
833년속일본후기3월 仁明 천황이 大極殿에서 즉위, 즉위 조서를 내림
833년속일본후기4월 귀화한 신라인 金礼眞 등 남녀 10명을 左京 五條에 호적 편입
834년속일본후기5월 藤原常嗣를 遣唐大使로 두고 備中權守를 겸하게 하고 三嶋嶋繼를 造舶次官으로 임명
834년속일본후기12월 지난 天長 연간에 편찬한 令義解를 시행한다는 조서
835년속일본후기2월 長岑高名을 遣唐 准判官, 松川貞嗣를 錄事, 譯語들을 임명
836년속일본후기2월 遣唐使를 위해 北野에서 천신지기에 제사 지내고 정무를 쉼
836년속일본후기9월 遣唐 대사·부사 등이 大宰府에서 입경하여 節刀를 반납(첫 항해 실패)
837년속일본후기12월 새벽부터 밤까지 큰바람, 京中 집들이 곳곳에서 파손
840년속일본후기5월 후태상천황(淳和)이 淳和院에서 崩, 近江·伊勢·美濃 三關을 굳게 지키게 함
840년속일본후기6월 유배되었던 小野篁이 입경, 황색 옷을 입고 절하며 사례
841년속일본후기9월 홍수로 백성 집이 떠내려가고 京中 다리와 山埼橋가 모두 끊김
842년속일본후기3월 渤海 客徒 賀福延 등이 河陽을 떠나 입경, 鴻臚館에 안치
842년속일본후기4월 渤海使 賀福延 등이 八省院에서 啓函과 信物을 바침
842년속일본후기7월 嵯峨 태상천황이 嵯峨院에서 崩(향년 57), 遺詔로 薄葬
842년속일본후기7월 承和의 變: 春宮坊 帶刀舍人 伴健岑이 橘逸勢와 합력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 하여 황태자(恒貞)를 폐하고 연루자를 유죄 처분
842년속일본후기8월 道康親王을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서
842년속일본후기8월 參議 正躬王이 廢太子를 淳和院으로 보냄
844년속일본후기7월 源常을 左大臣, 橘氏公을 右大臣에 임명, 같은 날 在唐 천태 請益僧 圓仁과 留學僧 圓載에게 황금 200小兩을 仁好 편에 보내게 함
845년속일본후기3월 仁壽殿 동쪽 廂에 불이 났으나 사람들이 꺼서 진화
849년속일본후기4월 領客使가 渤海使 王文矩 등을 입경시켜 鴻臚館에 안치, 宣命으로 12년 1회 조공 기한을 어긴 것을 용서
850년일본문덕천황실록3월 己亥, 仁明천황이 청량전에서 붕어 — 황태자 도코(문덕)가 신새·보검 등을 받고 동궁 아원으로 옮김
850년일본문덕천황실록3월 癸卯, 유조에 따라 검약하게 후카쿠사 산릉에 인명황제를 장사지냄
850년일본문덕천황실록3월 乙巳, 사가 산릉에 폭풍·뇌우로 나무가 쓰러져 중납언 아베노 야스히토를 보내 살피게 함
850년일본문덕천황실록5월 辛巳, 사가 태황태후 다치바나노 가치코 붕어(다음 날 深谷山에 박장)
850년일본문덕천황실록4월 甲子, 문덕천황이 대극전에서 즉위 (앞날 癸亥에 후카쿠사 산릉에 즉위를 고함)
850년일본문덕천황실록7월 己亥, 큰비로 대극전 앞 용미도 12장이 물에 무너짐
850년일본문덕천황실록11월 戊戌, 고레히토 친왕(뒷날 청화천황)을 황태자로 세움
850년속일본후기1월 도적 떼가 방화·약탈을 일삼아 左右京職과 기내 國司에게 수색하라는 勅
850년속일본후기2월 병이 위중해 황태자와 대신들을 침상 아래로 불러 유제를 받게 하고 매·개를 풀어 줌
850년속일본후기3월 仁明 천황이 清凉殿에서 崩, 璽·寶劍 등을 황태자 直曹로 모심
851년일본문덕천황실록2월 丙辰, 선황이 쉬던 청량전을 옮겨 가쇼지 불당으로 삼음(今上이 차마 쓰지 못해서)
851년일본문덕천황실록4월 庚午, 개원 인주(仁壽) — 즉위 첫해 흰 거북·감로 상서를 이유로 연호를 바꿈
851년일본문덕천황실록8월 甲寅, 수해를 입은 경사(京師) 사람에게 검비위사를 보내 곡식을 지급(앞서 己酉 큰비)
851년일본문덕천황실록8월 乙丑, 이세 재내친왕이 가모강에서 계(禊)하고 같은 날 노노미야(野宮)에 들어감 — 대상제 준비
851년일본문덕천황실록10월 甲子, 천황이 가모강에 행차해 대상제 앞 계사(禊事)를 크게 거행
851년일본문덕천황실록11월 辛卯, 대상제로 팔성원에서 제사, 이어 풍락원에서 연회
852년일본문덕천황실록2월 丁巳 저녁, 서쪽 하늘에 길이 5장쯤 되는 혜성이 나타남(관측지는 경사로 추정)
852년일본문덕천황실록윤8월 己卯, 앞서 乙亥의 큰바람(집이 날고 나무가 뽑힘) 피해 입은 경사 사람에게 늠원 쌀을 나눠줌
853년일본문덕천황실록2월, 경사와 기외에 포창(천연두류)이 퍼져 사망자가 많음 — 덴표 9년·고닌 5년 이후 세 번째
853년일본문덕천황실록4월 乙酉, 포창이 퍼져 백성이 죽어 가모제를 정지, 사자를 보내 사정을 아룀
853년일본문덕천황실록8월, 서경(西京)에 불이 나 180여 집으로 번짐
854년일본문덕천황실록7월 乙巳, 비젠국이 곡식을 끊은 우바새 한 명을 바침 — 신천원에 두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인이라 부름
855년일본문덕천황실록2월, 동북쪽에 긴 별(혜성)이 나타남(관측지는 경사로 추정)
855년일본문덕천황실록2월 丁卯, 우대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등에게 국사(續日本後紀)를 편수하라고 조(詔)함
856년일본문덕천황실록3월 戊午, 강가에 있어 물에 깎이는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쓰키요미사를 마쓰오 남쪽 산으로 옮김
856년일본문덕천황실록3월, 지진이 자주 일어 경사와 성 남쪽에서 집이 무너지거나 불탑이 기움
857년일본문덕천황실록1월, 역박사 오오카스가노 마노마로가 대연력이 당 달력과 어긋난다며 오기력(五紀曆)으로 새 달력을 만들겠다 주청, 허락
857년일본문덕천황실록2월 丁亥,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를 태정대신, 겐노 마코토를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시미를 우대신으로 임명
857년일본문덕천황실록2월 己丑, 미마사카의 흰 사슴·히타치의 연리지 상서를 이유로 천안(天安)으로 개원
857년일본문덕천황실록3월 癸丑, 경 남쪽의 무리 도적을 잡으려 좌우 근위·병위·검비위사를 보냄
857년일본문덕천황실록5월 乙丑 말, 장마가 개지 않고 홍수가 넘쳐 길·다리가 끊기고 둑이 터짐(5월 丙辰에도 경중 물이 넘침)
858년일본문덕천황실록4월 庚子, 이달 壬辰부터 己亥까지 이어진 비가 처음 갬(5월 壬午 대홍수 전의 장마)
858년일본문덕천황실록5월 壬午, 큰비에 홍수가 넘쳐 동굴천 물이 냉연원에 들고 좌우경이 수해를 입어 익사자가 많음
858년일본문덕천황실록8월 乙卯, 문덕천황이 신성전에서 붕어(앞서 辛亥 밤 갑자기 병이 들었고 壬子 병이 깊어 말을 못함)
858년일본문덕천황실록9월 甲子, 밤에 대행황제를 다무라(田邑) 산릉에 장사지냄 — 앞서 庚申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다무라향 마하라 언덕을 산릉터로 정함
858년일본삼대실록문덕천황이 8월 27일 냉연원 신성전에서 붕어. 근위 장수들이 황태자 숙소를 지키고 신새·보검 등을 황태자에게 넘김
858년일본삼대실록11월 7일 청화천황(9세)이 대극전에서 즉위하고 조(詔)를 선포함
860년일본삼대실록비바람이 그치지 않아 도성 동서 두 하천이 범람해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고, 해안 여러 나라에서 조수가 넘쳐 사람·가축 피해
863년일본삼대실록5월 20일 신천원에서 어령회를 엶. 숭도천황·이예친왕 등 억울하게 죽은 어령을 달래는 법회로, 동원(苑)의 4문을 열어 도성 사람이 구경하게 함
866년일본삼대실록윤3월 22일 응천문 화재 때문에 백관을 회창문 앞에 모음. 숭복사 승려 20명에게 대반야경을 7일간 읽게 하고, 범석사 승려 10명에게 사천왕비법을 7일간 닦게 하여 재변을 없애려 함. (응천문과 동서 누관은 윤3월 10일 밤 소실)
866년일본삼대실록8월 3일 좌경 사람 대택응취가 대납언 반선남과 우위문좌 반중용이 공모해 응천문에 불을 질렀다고 고발(응천문의 변)
866년일본삼대실록8월 19일 칙으로 태정대신(후지와라 요시후사)에게 천하의 정치를 대행하도록 함(섭정의 시작)
867년일본삼대실록이 해 안팎이 궁핍해 백성이 굶주리고 특히 기내가 심함. 도적이 무리 지어 길을 막고 약탈·방화하므로 국사에게 오가작통(보)을 맺어 감찰하게 함
869년일본삼대실록2월 1일 천황이 임헌하여 정명친왕(후의 양성천황)을 황태자로 세우고 책문을 읽음
869년일본삼대실록4월 13일 정관격(貞觀格) 편찬을 마치고 대납언 후지와라 우지무네 등이 궐에 바침
871년일본삼대실록윤8월 7일 천둥과 큰비로 강이 갑자기 넘쳐 도성의 길·다리가 휩쓸리고 집이 무너짐. 사자를 보내 신사에 폐백을 올려 비를 멈추게 빎
871년일본삼대실록9월 28일 태황태후 후지와라 준시(문덕천황의 어머니)가 붕어
871년일본삼대실록12월 14일 음양료가 내년에 천행(역병)이 있을 것이라 하고, 노인도 겨울 꽃이 핀 해는 천하 대역병이라 하여 오기칠도 여러 나라에 폐백·전경을 명함
872년일본삼대실록5월 24일 발해 대사 양성규가 사사로운 선물을 천황·황태자에게 바치기를 청해 허락됨. 같은 날 칙으로 곡연을 베풀고 어의를 내림(발해 사신 접대)
872년일본삼대실록9월 2일 태정대신 후지와라 요시후사가 동일조제에서 69세로 사망
875년일본삼대실록1월 28일 밤 냉연원 화재로 건물 54동이 타고 비각(秘閣) 소장 도서·문서가 재가 됨
875년일본삼대실록4월 28일 묘시에 동북쪽에 붉은 빛 혜성(원문 「白彗…其色赤」)이 나타나 광망이 생기고, 5월 2일에는 길이 1장 남짓. 같은 4월 28일 천황이 처음 사기를 읽기 시작
876년일본삼대실록4월 11일 전 단파수 안배방상·가사 홍흥을 불놓았다는 혐의로 추금(대극전 화재의 조사)
876년일본삼대실록11월 29일 천황(청화)이 황태자(양성)에게 양위하고, 우대신 후지와라 모토쓰네에게 어린 군주를 보필해 정치를 대행하게 함
877년일본삼대실록1월 3일 양성천황이 대극전이 아직 없어 풍락전에서 즉위하고 조(詔)를 선포
877년일본삼대실록4월 9일 사시에 대극전 재건을 시작. 비탄 목수 등과 친왕·공경이 팔성원에서 행사 대부와 공인을 대접
879년일본삼대실록10월 8일 대극전 낙성. 우대신이 조당원 함장당에서 낙성연(釁落)을 열고 작사에 참여한 사위 이하 공인과 비탄 목수까지 대접
880년일본삼대실록12월 5일 태상천황(청화)이 붕어했음을 내외에 알림. 유조로 거애를 하지 않고 심상하라 하며 제위(諸衛)를 엄중히 경계시키고 관(關)을 닫음
880년일본삼대실록12월 6일 자시 큰 지진, 밤부터 아침까지 16번. 대극전 서북 모퉁이 돌단이 갈라지고 궁성 담과 도성 집들이 많이 무너짐
883년일본삼대실록5월 2일 발해 대사 배정이 조당에서 왕계와 신물을 바침. 3일 풍락전에서 사연
884년일본삼대실록2월 4일 양성천황이 몸이 아프다며 태정대신에게 손위(遜位)를 청하는 친필을 보내고 이조원으로 옮겨 양위
884년일본삼대실록2월 23일 광효천황이 대극전에서 즉위하고 조(詔)를 선포
884년일본삼대실록3월 15일 밤 큰 천둥·비로 상주사 탑에 벼락이 쳐 5층에서 불이 나 강당·금당·종루·경장·보랑·중문이 순식간에 전소
886년일본삼대실록7월 7일 5월부터의 장마 끝에 큰 비바람과 홍수. 가모·송미 등 6사에 사자를 보내 폐백을 올려 비를 멈추도록 빎
887년일본삼대실록7월 30일 신시 큰 지진이 수 시각 계속. 천황이 인수전에서 자신전 남쪽 뜰로 피신. 도성과 오기칠도에 큰 피해, 바다 조수가 육지로 올라와 익사자가 많고 섭진국이 가장 심함(仁和 지진)
887년일본삼대실록8월 20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큰 비바람으로 나무가 뽑히고 집이 쓰러져 압사자가 많음. 가모강·가도노강이 범람해 인마가 다닐 수 없음
887년일본삼대실록8월 26일 천황이 병이 중해 제7황자(후의 우다천황)를 황태자로 세우고, 같은 날 사시에 인수전에서 58세로 붕어
1180년아즈마카가미4월 9일, 源頼政가 平清盛 토벌을 오래 꾀해 오다가 이날 밤 아들 仲綱 등과 以仁王의 三条高倉御所에 몰래 찾아가 源頼朝 등 源氏를 모아 平氏를 치라고 권했고, 令旨를 내리게 했다. 마침 서울에 있던 陸奥十郎義盛(行家)가 令旨를 들고 東國으로 향하게 했다.
1181년아즈마카가미윤2월 4일 술시, 入道 平相國(清盛)이 九條河原口 盛国의 집에서 죽었다. 지난달 25일부터 병이 들어 유언하기를 3일 후 장례하고 유골은 播磨國 山田 法花堂에 넣되, 자손은 오직 東國 귀복을 꾀하라 했다.
1181년아즈마카가미8월 13일, 藤原秀衡에게 頼朝를, 平資長에게 木曾義仲를 追討하라는 宣下가 있었다. 平氏의 신청에 따른 것이다.
1184년아즈마카가미(1184) 1월 20일, 範頼와 義経이 頼朝의 使로 수만 기를 이끌고 義仲를 치러 入洛했다. 範頼는 勢多로, 義経은 宇治路로 들어와 義仲 군이 두 길에서 막았으나 모두 패했다. 義仲는 近江國 粟津 부근에서 相摸 住人 石田次郎에게 목 베였다.
1184년아즈마카가미1월 26일, 検非違使들이 七條河原에서 義仲와 忠直·兼平·行親 등의 목을 받아 獄門 앞 나무에 걸었다. 또 囚人 樋口兼光도 데리고 돌았다.
1184년아즈마카가미1월 29일, 關東 두 장군(範頼·義経)이 平氏 정벌을 위해 군병을 이끌고 이날 京을 떠나 西國으로 향했다.
1184년아즈마카가미2월 14일, 右衛門権佐 定長이 勅定으로 本三位中將 重衡를 심문하러 故 中御門中納言 家成卿의 八條堀川堂에 갔다. 土肥実平이 같은 수레로 重衡를 데려와 弘庇에서 신문하고 구술 조항을 기록해 올렸다.
1184년아즈마카가미3월 10일, 本三位中將 重衡가 이날 京을 나와 關東으로 향했다. 梶原景時이 호송했으며 頼朝가 청한 것이다.
1184년아즈마카가미8월 26일, 義経의 飛脚이 도착해 10일 信兼의 아들 兼衡·信衡·兼時 등을 宿廬로 불러 죽였고, 11일 信兼에게 解官 宣旨가 내렸다고 알렸다.
1184년아즈마카가미9월 12일, 參河守 範頼의 사자가 와서 올린 글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入洛, 29일 追討使 官符를 받아 9월 1일 西海로 출발했다고 한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4월 4일, 平家가 모두 토멸되었다는 보고를 어젯밤 義経의 사자가 京都에 알렸고, 오늘 源弘綱이 죽은 자·생포자의 명단을 仙洞(후白河)에 올렸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8월 29일, 16일 小除目 聞書가 이날 도착해 源氏가 대부분 朝恩을 입었다. 義範이 伊豆守, 惟義가 相摸守, 義兼가 上總介, 義経이 伊予守 등이다. 義経 관직은 4월경 泰経에게 은밀히 부탁해 둔 것으로, 불의가 드러났으나 勅定에 맡기게 됐고 이들 國은 當時 關東御分國이 되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0월 17일, 土佐房昌俊이 60여 기를 거느리고 伊予大夫判官 義経의 六條室町亭을 습격했다. 義経 쪽은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佐藤忠信 등과 문을 열고 달려나가 싸웠고 行家도 뒤에서 가세해 昌俊이 물러났다. 義経은 곧 仙洞에 달려가 무사함을 아뢰었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1월 25일, 北條時政이 入洛했다는 소문이다. 行家·義経의 반역에 頼朝가 분개한 사정을 師中納言이 아뢰었고, 이날 반드시 찾아내라는 宣下가 내려졌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1월 26일, 大蔵卿 泰経가 칩거했다. 義経의 追討 宣旨를 청한 것을 전한 이가 泰経이었기에 頼朝가 몹시 분개해 그 뜻이 천聽에 닿아 勅定이 내려진 결과라 한다. 泰経가 行家·義経 모반에 동조한 글을 대나무 가지에 끼워 師中納言의 뜰에 세웠다.
1185년아즈마카가미(1185) 11월 28일, 諸國에 일률로 守護·地頭를 보임하고, 權門勢家의 庄公을 가리지 않고 段別 5升의 兵粮米를 부과하는 일을 이날 밤 北條時政이 藤中納言 經房卿에게 아뢰었다.

그곳이 든 같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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